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성탄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함께 기뻐하기 원하며 성탄절 아침 인사드립니다.

이 칙칙한 질곡의 땅에 사랑의 빛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은 여전히 온 인류의 희망이자 유일한 돌파구인 줄 압니다.

비록 인류의 문명이 가속화되고 이전 세대는 상상도하지 못했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칙칙한 색깔의 농도는 갈수록 짙어만 가는 느낌입니다. 세계 도처의 기근과 전쟁과, 게다가 환경오염, 나아가서는 지구 전체의 기상변화를 생각하면, 마치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 듯한 암울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궁핍에 궁핍을 더하고, 질곡에 질곡을 더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야곱의 인생고백처럼, 이 땅에 사는 것은,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을 사는 것일뿐, 연수의 자랑은 그만큼 슬픔의 세월이 길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 결코 자랑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세상의 운명을 훤히 꿰뚫어 보셨음에도, 그리고 철저하게 배척을 받으셨음에도, 끝까지 이 세상을 부둥켜 안고, 에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셨던 우리 주님, 그분의 성육신 사랑이 온 인류의 희망임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또 다른 '사소한' 명분과 형식에 얽매인 채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오, 주님 우리의 무지와 왜곡과 편벽을 일깨우소서.
이 아침도 주님께서 이 질곡과 궁핍의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와 평강의 원천임을 다시금 되뇌이고 묵상하게 하소서. 나아가서 우리도 주님처럼 낮아지고 육화하는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그래서 이 어두운 땅에 빛으로 살게 하시고, 복음의 그 찬란한 빛 비추게 하소서.

O Come O Come Immanuel! 오 주님, 이 땅보다도 더 칙칙하고 왜곡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이 아침도 찾아 오소서!

임마누엘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성탄을 맞는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위에 임하시기를 빌면서,

권 영석 올림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김홍근 선교사의 편지

Shalom. Friends.
This is Edward Kim.
I returned home to Canada now. Thanks for your prayers during the Beresheet festival.

“Love your enemies….”
Yes, this is the teaching of Yeshua. Love your enemies… However, persecutors are not always necessarily enemies. They think that they are doing right things for the Lord. Mostly, they are devoted to the Lord. They just don’t know what really truth is… It isn’t really easy to love people who threaten us, especially when they are buzzing us for 24 hours with no break. It was a great challenge to be in the festival training ourselves to learn how to love our enemies.

“We’ve killed your Jesus! He is dead!”
“Jesus is not Jewish Messiah. Don’t listen those dangerous missionaries who have killed our Jewish children in the name of Jesus!”

“Whatever you say, Yeshua loves you!” I said. Then, I heard Yad LeAchim members spat and cursed on me.
“Go to hell! Get lost!”

Anti-missionary group, Yad LeAchim, has been watching us again for 24 hours and for three days. They have been buzzing us all the time during the Beresheet festival. This year, they brought an official authority to push us away. They brought director of regional council, and their attorney. They brought policemen. They didn’t care what others are doing— drug, alcohol for kids, false teaching to children. However, they did really care what we were doing there—Sharing true life with Yeshua.

They have chasing me, cursed on me, and spat on me. “You are a dirty missionary! You are selling our Jewish souls!” Well… nothing has been changed since Yeshua crucified on the cross two thousand years ago. In the morning during our team devotion time, I told to team members not to argue with them, but to love them because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They think that they are really protecting their own Jewish people from “dangerous missionaries” because that is how they have been educated.

However, God haven’t stop working there. It was the only teashop outside of festival. Many people didn’t buy ticket to the festival! They camped near our teashop! Every night there were full of people in the out teashop! We had our worship teams that run stage day and night! We also had movie time with JESUS film every night! We have put full volume of sound so that all people in the camping site can hear the gospel. I saw many secular people joined to our worship to the Lord. The name of the Yeshua has been declared there. Several teens have been healed during our prayer. Several others have prayed to accept Yeshua as their Messiah. We do not have yet exact number of people who prayed to accept Yeshua. I will let you know when I get it after our debriefing meeting of our staffs.

God has used us in the festival to be witness of God’s love, and healed many broken hearts. There were a dozen of commando soldiers by our teashop, who took a short vacation. They have tried to escape from their stress by yelling and making fun of people around them. They have gone through really tough time in the army. Many of them have lost their friends in combats. They have tried to forget every pain just by drinking and making fun of people. They have overtaken out teashop from the morning, and yelling to people coming to the teashop. My heart was really boiling inside, but invited them for breakfast instead of kicking them away. While they were eating, our staff members have shared them Gospel. Then, they enjoyed being with us for the last days of the festival. They even tried protect us from Yad LeAchim.

Thanks for your prayer. I’m glad to be with my family. It was a challenging time for my wife to be by herself. God has blessed us.

Keep praying for us to return to home in Israel someday. Keep praying for raising our Share support during our HMA. We need to raise around $2000 this year.

Blessings.
Ed

PS: See pictures from Berehseet:
http://gallery.me.com/beityeshua#100135

2008년 9월 27일 토요일

권영석 목사 근황

사랑하는 교우님들에게,


그동안 적조하여서 송구합니다. 그간도 주님 안에서 여상하시겠지요? 주님의 크신 은혜가 날이 갈수록 더욱 크고 놀랍기만 합니다.


다 름 아니라, 저는 그동안 정들었던 ‘푸른 목장 교회’(L.A. 북쪽의 밸리 지역의 교민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의 ‘학원복음화협의회’ 사역을 위해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학복협은 지난 20여 년간 국내의 대학생 선교 단체들과 지역교회의 대학부들을 아우르는 매개역할을 해 온 일종의 연합체 성격의 협력단체인데, 상임대표로 수고하시던 이승장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후 후임자를 물색하던 중 제게 요청이 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선교단체와 지역교회 둘 다를 봉사했던 저의 경험이 학복협 사역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 민교회의 열악한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겪은 저로서 선뜻 고국행을 결정할 수 없어서 수개월 동안 갈등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주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야하는 것이 종의 소임인 만큼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아직 교회의 후임 목회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임하게 되어 한편 부담이 됩니다만, 주님께서 이 곳 교회도 친히 돌보시리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리더십(실행위원회와 청빙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한 국에 부칠 짐들을 싸고, 이곳의 집을 줄여서 딸 아이(오은)의 학교 인근의 아파트로 옮기는 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이들과 헤어져서 지내야 하는 문제, 한국에 들어가서 새로이 거처를 마련하는 문제, 더욱이 그간의 변모한 한국 상황을 따라잡는 일 등 쉽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주님께서 한걸음씩 인도하시리라 믿고, 모험의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이 모든 전환의 과정에서부터 주님과 동행하며, 잘 감당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귀국한 후에 다시 알려드리기로 하고, 우선 저희의 미국내 연락처(전화/주소)가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개인정보인 주소와 전화번호는 이곳에 게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메일로 직접 받아보신 분들도 많이 있으시고 해서 그리하였습니다. 따로 권목사님의 연락처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저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omdchung@gmail.com)

2008년 9월 8일 월요일

설교 본문 : 행 18:1~11

1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2008년 9월 5일 금요일

목회 칼럼: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푸른 목장 교회에 청빙 요청을 수락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또 작별을 고하게 되고 보니, 참으로 미안하고 송구스럽기도 하고 또 아쉽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유구무언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지만, 칼럼란을 빌어서 몇 가지 회한을 정리함으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저와 저희 가족을 한 식구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밸리와는 별 인연이 없던 저희였지만, 더운 날씨와 기괴한 바람소리가 이제 그리 낯설지 않게 된 데는 여러분의 우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 줄 압니다. 부모님처럼 따뜻이 대해주시던 권사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허물없게 대해 주시던 형님들과 누님들, 순박하고 순수하던 또래의 집사님들, 동생같고 조카 같이 따르고 존경해 주던 손아래 형제 자매들... 제가 베푼 것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허나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전형적인 이민자로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기에 이민자의 애환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태생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저의 가르침과 목회활동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원론적이었으며, 여러분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제 가슴 한 구석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는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제 생각은, 지금도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굳게 믿지만, 대다수의 교우들에게는 너무나 이상적이요 꿈같은 얘기로 들리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게 됩니다.

이 외에도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한 두 가지겠습니까마는, 하나님께서는 지난 3년 세월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제게나 여러분에게나, 하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는지,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마땅히 어떤 모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으매,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비록 당장 가시적인 변화로 드러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도전해 주셨던 바를 꼬옥 붙드시고, 또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들어 순종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 개인에게나 우리 교회 위에 지혜를 주시고, 더욱 새롭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예상치 않았던 갑작스런 부르심으로 정들었던 교회와 교우들을 생이별하게 된 이 송구스러운 일이, (여러분에게도 황당스러웠겠습니다만, 제 자신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간구하렵니다.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곧 전환기 이민 사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훌륭한 목자를 새로이 보내 주시고 세워주셔서 그 동안 부족했던 일들을 보완하여 주심으로 우리 푸른 목장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밸리지역 일원에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는 참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해 주실 줄로 믿고 모든 것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신 손에 의탁하렵니다. 아울러서 저와 저희 가족들을 또 요긴하게 사용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한국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귀중한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저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언제일는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은 소중히 간직해 주시고, 섭섭하고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털어 내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2008년 8월 31일 권영석 올림.

설교 본문 연구: 십자가에 못 박힌 믿음의 선배 바울

(고후 11:16-12:10/ 구체적인 case: 고전 9:1-27/행 20:33-35)
1. 바울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결국 무엇을 일컫는가? (11:16-17)
2. 이 세상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어리석은 자들”, 곧 스스로 자랑하는 자들을 도리어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그리스도인(‘주를 따라 자랑하는 자’) 들의 본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랑을 늘어놓으려 하는(11:21- 12:1) 까닭은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11:23, 참조: 10:10)
3. 바울은 안팎으로 고난을 당했다. 내적으로 받은 바울의 스트레스는 무엇 때문인가?(11:28) 이는 결국 고린도 교회에 속한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겠는가?(11:29)
4.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의 대표적인 예로써 다메섹 탈출 경험(11:32-33)을 언급한다. 이것이 어떻게 바울의 약함을 드러내어 주는 예가 될까?
5. 12:1-4의 경험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이다. 그런데, 왜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6. 바울은 왜 이런 압도적인 체험을 배제하고 도리어 자신의 가시로 말미암는 연약함을 부각시키려 애쓰는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찾아 보자.(12:6, 9- 10)
7.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사람이다(참조: 13:4).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또 우리가 처한 일상에서 어떻게 바울의 기본원리(12:10b)를 살아낼 수 있을까?
다음 주 말씀: 작별의 슬픔과 소망 (행 20:17-38)

목회칼럼 : 자기 부인-세상의 연줄을 끊어버려라!

인생은 어딘가/누군가에 소속하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이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의 품을 떠난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보일지라도, 기껏해야 상대적인 존재 곧 또-다른 “불안한 존재”에 우리의 소속/충성을 맡기고 살아야 하는 풍전등화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전설적인 영웅이나,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지도자라 해도, 결국은 여전히 불완전한 인생일 뿐이며, 우리의 안전을 영원히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는 소유/돈이나, 권세/빽, 인기 등과 같은
이 세상의 파우어도 궁극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은 못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적인 파우어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든 그 세를 불려야 하고, 연루된 사람들을 실타래처럼 더 많이 규합해 나가야 한다. 이런 세 싸움에서 손쉽게 힘을 규합할 수 있는 방법이 소위 연줄을 잡는 것이다. 그러나, 강부자나 고소영 같은 학연, 지연, 혈연, 교연 등의 “연줄”은 피차간의 필요가 맞물려 있는 동안은 강력한 본드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어느 한 쪽에서 필요의 수명이 다하면, 그야말로 줄 떨어진 연처럼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서 피차가 소외되고 만다. 그래서 이 연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폭력을 휘둘러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들거나(violence), 그 폭력을 피해가기 위해 조종/기만(manipulation) 함으로써 관계를 팽팽히 긴장시켜야 한다.
세상은 이것을 훌륭한 ‘매니지먼트’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런 식의 매니지먼트는 본질에 대한 관심은 제쳐두고, 끊임없는 야합과 이합집산의 이전투구를 반복하도록 할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다름 아니라, 이런 식의 연줄을 끊어버리고, 이 세상적인 매니지먼트를 중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 참되신 하나님께 소속하게 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더 이상 이런 위협과 조종의 방식을 좇을 필요가 없다. 도리어 뭇사람(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누구든지, 심지어 원수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 인격의 바운데리를 지켜주며, 나아가서 손해를 보더라도 서로 불쌍히 여겨서 헤아려 주고, 용납해 주고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사실 하늘 나라의 막강한 파우어를 모두 지니신 우리 주님께서 하늘 나라의 모든 연줄을 끊어버리고 철저히 낮아지심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도리어 전혀 파우어 형성에 도움이 안되는 죄인/세리/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지 않으셨던가! 아마도 주님께서 자신의 힘을 더욱 굳히고 과시하시기 위해 연줄을 규합하고자 하셨던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감생심 그분의 측근 그룹에 접근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자기 부인이란, 이처럼 이 세상적인 안전과 파우어의 연줄을 끊어버리고, 도리어 이 세상을 “피하여”(counter-walk: 역행하여) 우리 주님의 모범을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vulnerable)한만큼,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시며 챙겨주실 것이다.

퍼뮤니케이션

친구에게 (2)

여보쇼 친구여, 수고가 크구려.
부모형제 떼어놓고,
자식 위해 교육 위해,
낯선 땅을 찾아왔는데,

지나온 길 돌아보오.
어른 말씀 순종하는
아들 하나 키워놨는가?
부모 마음 알아주는
딸내미나 하나 있는가?

이웃과 사회 위해 나누고 희생을 할 인물이오
나라와 민족 위해 달려나가 줄 인물이오.

허허 어쩌나,
낳은 자식은 있는데 키워 놓은 자식은 없을까 하오.

하늘 위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수많은 자손 위에 우리가 해가 되어 준다면,
밤의 별처럼 한낮의 모래처럼 반짝이고 빛내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출까 하오.

(신호범, 기윤실 특강 중에서)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퍼뮤니케이션: 아는 놈/ 친구에게(1)

“아는 놈야?”
“모르는 놈인데?”
턱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 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
모르는 놈이다. (김연승,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친구에게 (1),

여보쇼 친구여, 고생이 많구려.
밤도 낮도, 허리 펼 새도 없이 일하고 돈 벌었는데,
허리 펴고 한 번 돌아보오.

앞집 코큰 아저씨와 악수나 한번 나눠봤는지
뒷집 뚱보 아줌마랑 통성명이나 하였는지?

언덕 위의 저택에서 가라오케 파티 열고
캐딜락 스피커에선 흘러간 옛 노래 흥겨운데,

허허 이러다간 끼리끼리 한민족
꼴불견의 한 민족 될까 하오.

타국 땅 비치는 외로운 저 달은
어릴 적 고향 초가 위의 그 달이 분명한데,

이 땅도 내 땅 삼고, 타민족도 내 이웃 삼아,
가꾸고 사랑함이 어떨까 하오. (신호범, 기윤실 강의 중)

목회칼럼 :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신 주님의 은총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백성으로 구별된 것은 우리가 특별해짐으로써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별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심으로써 된 것이다. 즉 우리가 특별히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도, 우리가 특별히 거룩해졌기 때문에 된 것도 아니다. 오직, 거룩하신 그분께서 거룩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 속에 오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우리 스스로 이런 koine(보통, 속된, 더러운, 쌍<常>스러운) 상태를 벗어날/초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오,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이런 코이네 상태로 낮아지심으로, 도리어 우리의 모든 일상이 그분과 동행하는 가운데 거룩하게 변하게 해 주신 은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요, 이런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도(백성)들이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 모든 구석구석이 이제는 새로워졌고 의미있는 것으로 변화되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매일 같이 대하던 밥 한 공기, 어김없이 찾아오는 출근 시간이 새로운 까닭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가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소유하셨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일상의 모든 시공간에 오셔서 우리의 일상을 ‘거룩’케 하시는 그분과 기쁘게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상을 제쳐두고 무슨 신령한 체험이나 의식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거룩케 하려던 이전의 발상과 lifestyle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새로운 position/identity와 그에 걸맞은 lifestyle로 사는 걸음마를 연습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의미없이 또는 도리어 허황하고 되지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허우적대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identity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lifestyle을 익혀 나가야 한다.

아침에 단잠에서 깨어나서, 커피한잔과 함께 하루를 여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모든 만남과 관계들, 직장의 반복되는 일과와, 식구들과 둘러앉아서 서로 서로 감사하며 축하하는 저녁 만찬, 그리고 하루의 창을 닫는 고요한 저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일상이, 그분과 동행하는 가운데 새로운 의미로 가득하고 은혜와 감사로 충만한, 거룩한 일상이 되게 된 것을 실제로 경험(actualize)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부인의 삶은, 분명 이처럼 이전의 경건치 않은 세상의 정욕을 향해 “안돼”라고 말하는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우리의 허무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하여, 주님 안에서 다시 지음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보람있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신나고 신비스러운 여정을 의미한다.

Always thank God and be satisfied in Christ Jesus our Lord.

설교 본문 연구: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눅 10:25-37)
1.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질문한 의도/동기는?(25절) 이 질문이 어째서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었을까?

2. 예수께서 어떻게 이 질문의 공을 다시 율법사에 넘기시는가?(26절)

3. 율법사가 율법에서 읽은 내용에 기초해서 제시한 대답은?(27절)

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27절)

5. 예수께서 칭찬하시면서 '그대로 행하라'고 하자, 율법사는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29절). 이 두 번째 질문의 저의는 무엇일까?(29절)

6.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이 비유의 요점은 무엇일까?(36-37상절)

7.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간 것과 사마리아인이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 준 것을 대조해 볼 때, 그 차이는 결국 어디서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31-35절) (참고: 당시 가난한 사람이 기본 숙식을 해결하는데 하루 1/12 데나리온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2 데나리온은 24일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다.)

8.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어떤 교훈을 받았을까? 특히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음을 고려해 보라. (참고: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에 버금가는 금기사항이었다.)

9. 비유 속의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런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웃으로서 곤궁에 처한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영생을 이미 얻은 우리는 더더욱 '이웃'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다음 주 말씀: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산 믿음의 선배 바울
(고후 11:16-12:10/ 고전 9:1-27/ 행 20:33-35)

2008년 8월 11일 월요일

설교 본문 연구: 신령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잘못된 구분(막 7:1-23)

1. 예수께 접근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내려 온 사람들인가? (1절)
2. 그들이 제기한 문제,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은 것(2, 5절)이 뭬 그리 문제인가? (3-4절)
3. 이들을 향해, 예수께서 다짜고짜 인용한 예언서의 내용은? (6-7절)
4. 이에 비추어 볼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9절, 특히 6절의 "교훈을 삼아"에 주목하라.)
5. 예수께서 그 근거로 더 제시하신, 시범적인 사례로 제시한 예는? (11-13절)
6. "정결예법"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보라. (15-16절)
7.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께서, 이 원리를 한 단계 더 비약적으로 적용하시고 있는 내용은? (18-19절, 특히 19절 하반절; 참조: 행 10:14-15, 28, 11:8-9, 21:28, 롬 14:14, 히 9:13, 10:29)
8. 20-23절에서 예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제는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을 말씀하신다. 그 목록의 내용을 열거해 보라.
9. 이런 [고의적인] 악한 생각들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의 유전이 이런 악한 생각들을 바로잡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까?

다음 주 말씀: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눅 10:25-37)

선교지 소식: 작은 불꽃 소식

"Be a Timothy, Make a Timothy!"

이 캐치 프레이즈는 8.11-15 우크라이나의 흑해 해변 니콜라이에서 실시하는 우크라이나 디모데 아카데미 08년 여름 훈련의 주제입니다. '디모데가 되고, 디모데를 만들자'는 우리 선교회가 중앙 아메리카 3개국에서 열매를 거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배출하는 사역의 캐치 프레이즈이며 동구라파의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장차 중앙 아시아를 포함한 러시아 언어권의 제자화 사역을 향한 대망의 도전입니다.

이번 5일간의 실전사역은 지금까지 훈련시킨 초급 제자들에게 실전을 경험시켜, 배운 바 말씀이 성령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사역하시는 생명 그 자체이며, 훈련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오늘도 강력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역을 통해 5-10명의 초급 장교급 지도자들이 부상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가 인원은 70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일인당 미화 100불 예산을 세웠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방된 젊은이들은 우리처럼 자유롭게 돈을 벌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훈련장에 오는 장거리 열차 비용과 5일간의 숙식과 장소 대여비 모두를 계산하여 현지에서 1인당 100불로 계산한 것입니다. 훈련을 위해서는, 훈련생이 있어야 하고, 전문적인 훈련자가 있어야 하며, 소요 경비가 조달되어야 하고, 훈련에 필요한 좋은 자료를 준비하고, 전체적인 진행을 종합적으로 수행할 재능를 가진 경험있는 스태프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크라이나의 우리 훈련은 항상 "기적" 가운데 공급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우크라이나입니까? 제 자신은 오랜 동안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바드의 역사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오래 전에 쓴 '문명의 충돌'에서,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하는 것이 바로 여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를 가르면서 흐르는 아름다운 드네프레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을 무시무시한 동서 문명의 충돌 지점이라는 씨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러시아의 총리 푸틴은 만일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충동질하여 러시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정책을 고집한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동과 서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주님의 제자 안드레가 핍박을 피해 복음을 전한 곳, 815-885년 사이에 콘스탄틴 성을 가진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의 슬라브어 문자화와 선교 사역, 999년 이해 블라디미르로 인한 러시아 정교회국가로 부상하게 된 오랜 동안의 기독교 문화, 서방 카톨릭과 동방 교회간의 미묘한 관계는 비록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러시아 정교회의 원조국이지만 아직도 그 유산이 보존되도록 해 왔던 민족, 한국 민족처럼 스탈린 시대 전부터 전 세계에 해외 국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슴에 눈물진 한을 갖고 사는 민족, 한국 전쟁 때는 젊은이들이 쏘련군으로 와서 목숨을 버리고 간 민족, 인구 4700만의 이 긴 기독교 역사의 명목상의 기독교 국가로 변해 버린 나라..., 다만 뭔가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장차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여 러시아어권과 전 세계에 선교사들을 많이 (마치 한국 교회처럼) 보낼 나라인 것만은 보입니다. 이 일에 우리를 사용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놀랍습니까? 계속하여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십시오. (이순정 목사 올림)

목회 칼럼: 다시 교회를 생각한다.

가정이 해체되고, 커뮤니티가 뒤틀려 있거나 아예 사라져 가고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떠난 이 땅의 인간들이 입은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커뮤니티 없이,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될 수도 없고, 도리어 기괴한 모습의 인간들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던 까닭은 분명 바로 이런 절박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그래서 교회를 두고 주님의 가정이오, 새로운 커뮤니티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역교회들은 이 땅의 커뮤니티 부재와 뒤틀린 커뮤니티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이 땅의 커뮤니티보다 도리어 더 칙칙한 색깔을 띄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일까? 우리를 궁극적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기구도, 인간적인 지도자도, 트렌디한 설교나 음악이나 또 어떤 프로그램도, 그럴듯한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조차 참된 커뮤니티로 꾸리지 못하는 까닭은, 건물이 시원찮아서도, 조직이나 기구가 없어서도, 지도자가 나빠서만도, 프로그램이 없어서도, 사명선언문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 그 마음을 본받아서 서로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낮아지려는 마음, 서로 귀하게 여기고 보듬으려는 마음,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殺身成仁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도리어 여전히 내가 유익을 얻고, 내가 대접을 받고,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남보다] 잘되어야겠다는 마음,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키고, 헐뜯기까지 하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다름 아닌 주님의 몸, 곧 주님의 마음이 신경과 핏줄처럼 연결되어 온 몸에 고루 퍼져서 그 영향력을 나타내는 커뮤니티이다. 교회 창립 35돐을 맞아, 과연 우리 개개인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새로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인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주님의 마음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매듭과 옹이는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성육신하시기까지 우리를 보듬으신 우리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세워나가자. 그리하면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설교 본문 연구: 엡 2:1-10 자기를 부인하는 삶: 뒤바뀐 인생의 목표

1. 바울은 이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상태를 한 마디로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죽은 상태에 놓이게 된 까닭은 무엇때문인가? (1절)
2. 그 때 우리의 삶의 양태는 어떠했나? (2-3절)
3.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무엇에 근거하여서인가? (4절)
4. 5-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연합]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세 가지 동사는?
5. 바울은 이 세 동사를 다 과거 시제(aorist)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의미와 강조점은 무엇일까? (물론 미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 참조: 롬 8:15과 23절을 서로 비교해 보라.)
6.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연합시켜 주신 것(연합한 것으로 count해 주시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7절)
8. 8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구원인가, 은혜인가?
9. '우리는 그의 만드신/창조하신 바'라는 말은 다시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요약해 준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바,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신(참조 고후 5:17, 갈 6:15) 목적은 무엇인가?(10절, 참조 1:4)
10. (에베소서 전체의 문맥에서) "선한 일"은 어떤 일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참조: 빌 2:13)

다음 주 말씀: 자기를 부인하는 삶: 신령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잘못된 구분(막 7:1-23)

목회 칼럼: 목적이 분명한 인생

누군가 이민생활을 빗대어, 빌빌(bills after bills)하는 인생이라 했던가?! 그러나, 어찌 페이먼트 하다가 인생이 끝나서야 쓰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목적 있는 인생"(Purpose-Driven Life)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성경은 구체적인 목표를 획일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이면 누구나 지향해야 할 공통적인 가치들(core values)을 제시한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조물주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 이웃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사람보다 돈이 더 대접을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가치에 따라 인생의 목표를 정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도리어 "어리석은"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기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 만하신 분이 또 있으랴?! 비록, 무지한 세상은 그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선적인 가치를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셨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따라 죽으심으로써, 우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또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주된 까닭은, 이처럼 뚜렷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그저 이 시대의 풍조/가치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안목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쾌락에 온통 사로 잡혀 있는 이상, 敬天愛人의 고상한 가치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며, 고상하지도 보람되지도 않은 부끄러운 종말을 향해 방황하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목장 교회 교우들은 그저 빌빌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목적있는 인생이 다 되도록 하자. (2005년 10월 30일 주보에서)

2008년 8월 1일 금요일

퍼뮤니케이션: 이 민족은 무엇인가?

떠나라, 그 말씀 순종하고 모두 버렸습니다.
부모도 친구도 앞산의 진달래도, 담밑의 봉숭아도 모두 버렸습니다.

가라, 그 말씀 좇아 건너건너 왔습니다.
산도 강도, 바다에 눈물 뿌리며 건너건너 왔습니다.

중국사람처럼 요리솜씨가 없어도,
독일사람처럼 과학자가 못되어도,
일본사람처럼 기술자는 아니어도
이 민족은 새날 밝도록 기도하고,
내일의 소망 가운데 견디는 오직 믿음,
믿음입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아 새벽 이슬 옷깃적시며
달려나갈 오직 교회,
교회는 소망입니다.

마지막 명령 따라 땅끝까지 사명 다하는 오직 주님,
주님은 사랑입니다.
되리라!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케 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신호범 박사, 2007. 4. 28 L.A. 기윤실 특강 중)

설교 본문 연구: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 "어떻게"의 문제 (7.27.08)

롬 8:1-17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째서 정죄가 없게(1절) 되었는가?(2절)
2. 우리는 육신의 한계로 인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3절).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율법의 요구가 다 충족되도록
해 주셨는가? (2절, 3-4절)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누구의 인도를 따라 살게 되었는가? (4절, 14절)
4. 육신대로 생각하고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는커녕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5-8절)
5.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제 육신에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속하게 되었는가? (8-9절)
6. 성령은 생명의 영, 곧 살리는 영이기에(10절, 각주 참조)
영에 거하는 사람들은 장차 어떤 것까지 바랄 수 있게 되었는가? (11절)
7. 이런 성령을 소유한 자들의 lifestyle은 이제 더 이상 육신에 굴복하여 육신,
곧 하나님없이 지내던 이전처럼 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또 살아서도 안된다 (12절). 도리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3절)
8. 우리가 받은 성령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누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는가?(15절)
따라서 우리에게는 무슨 권리가 있는가?(16-17절)
9. 이런 우리들에게 고난이 수반되는/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17절, 28-30절)
다음 주 말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 모범생 선배들 (고후 11:16-12:10)

목회 칼럼: 용서는 event가 아니라 과정이다. (7.20.08)

용서의 비결은 긍휼에 있는 것이지, 화술이나 대인관계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창고에 무상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간만 잘 모면하면 되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순간이겠지만, 용서에는 그런 결심보다 훨씬 더 많은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용서인 구원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회복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과 매한가지이리라. 하나님께서도, 사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으며, 용서의 때를 정하시고, 그것을 선포하셨으며,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적반하장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회복된 관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여전히 [천상에서] 중보하고 계시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용서도, 견책(rebuking) - 회개와 고백 - 용서의 선언 - 관계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절차가 제대로 갖추어져야 그 과정이 마무리된다. 수직관계 중심으로 신앙을 배운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한 대목에 이르면 이내 난처해지고 만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더욱이, 관계가 깨어졌을 때에,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먼저 견책(rebuking)의 책임을 요구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즉 온갖 gossip으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당사자/가해자에게 찾아가서, '내 boundary가 침범을 당했노라', '내가 심히 불쾌했노라'고 알리는 주도권을 피해-당사자가 행사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형제 자매를 비판하여 내치기(judge-away)보다는 도리어 긍휼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먼저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서로 함께 형제 자매가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지사지에 힘입어서,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끝까지 응하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도리어 discipline할 것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한 몸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healing power가 있다. 이 power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나 고독과 소외의 병을 시름시름 앓을 것이며 물기없는 나무처럼 생기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 본문 연구: 천국 백성의 Basic life-style: 십자가의 자기부인 (7.20.08)

막 8:27-38, 10:45

1. 막 8:33-38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하셨나? 왜 그런가?
2. 여기서 베드로가 저지른 잘못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논리로 추구할/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전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어떻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3. 나는 과연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가? 만일 베드로의 말처럼 주님께서 만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4. 막 10:32-34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이 메시아로서 당할 일을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이상 노골적으로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뭔가 심히 불편하였을 것이다(참조: 9:31-32).
5. 이는 여전히 허황한 요구를 하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의 비정상적인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예수님과 identify하는 것(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6. 다른 제자들이 격분한 것을 보면(41절), 다들 한통속으로서 동일하게 허황한 꿈을 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꾼 꿈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7.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은 무슨 꿈인가?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허황하고 황당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되짚어 보라.
8. 결국 열쇠는 우리의 왕으로 오신, 곧 하나님 나라의 임금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lordship style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상반되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9.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천국 백성의 lifestyle에 대한 이해차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갈등이 있다면?
10.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이런 lifestyle을 사셨다면, 우리가 그리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우리의 old lifestyle은 우리 자신은 물론 이 세상을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 아닌가?!
11. 참고로 사도 바울의 lifestyle이 어떻게 우리 주님의 lifestyle을 모방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참조: 고전 10:31-33)

목회 칼럼: 용서의 출발점 (7.13.08)

용서의 출발점은 뭐니뭐니해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라 하겠다. 뭔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분노와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어하는 복수심은 우리 인간의 지극히 정상적인 정서요, 이런 정서적인 센서가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관계가 깨어진 데(Boundary Issue)에 대한 인식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의 센서가 인식하는 [fair-unfair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용서와 관계 회복에 이르게 해 준다.

사실, 긍휼로 넘어서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 긍휼은, 상황이나 여건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물리적 정서적인 타격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처지를 감안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겠다는 각오요 태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언약적인 긍휼의 씨앗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표현된 것이며, 결국은 우리의 배역한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런 긍휼을 맛본 자들, 이런 긍휼의 수혜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따라서 성도의 가장 으뜸가는 본분은 바로 이 긍휼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실제적으로 더욱 알아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 큰 긍휼에 기초하여 우리도 서로 간에 작은 긍휼을 반향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주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일만 달란트의 은혜에 기초하여 백 데나리온의 은혜를 베푸는 삶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의 비결은 긍휼에 있는 것이지, 화술이나 대인관계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긍휼이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긍휼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으니, 하나님은 긍휼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우리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서 서로서로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셨다면,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 긍휼의 창고에 무상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이 긍휼의 비밀 열쇠를 주저하지 말고 사용하는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자.

설교 본문 연구 (7.13.08)

용서 받은 성도의 제일가는 본분: 용서하는 삶 (마 6:12/ 18:15-35)

1.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 즉 하나님에 관한 기도와
우리 인간의 필요에 관한 기도로 나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크게 3가지로 나누셨다. 그 중 한 가지가 용서에 대한 것이다. 용서의 문제가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가? (참조: 14-15절)
2. 사실 우리의 일용할 [육체적인] 양식의 문제 역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용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3. 그런데, 이 기도에는 단서 구절이 붙어 있다. 여기서 “같이”란,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무슨 뜻인가?
4. 7:1-5은 용서에 대한 기도의 해설판이라고 할 수 있다. (cf.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의 해설판이 6:19-34인 것처럼) 즉 주님께서는 서로 OO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가?
5. 우리가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비판하기 전에 왜 먼저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만 할까?
6. 마 18:15-35의 비유를 빌자면, 주님께서는 우리 눈의 들보(일만 달란트)를 제거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백 데나리온)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7.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 역시, 서로 서로 죄를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다. 18:35와 6:14-15의 상응성을 생각해 보라.
8. 18:15은 회개의 책임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있지만, 견책(rebuking)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9. 용서의 문제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18:18-20). 혹 오늘날 우리의 관계가 교회 안에서마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이 말씀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 주 말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길 (막 8:27-38)

목회 칼럼: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7.6.08)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얼른 생각하면, 교회는 당연히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교회는 불신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의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얘기는 확 달라진다. 교회의 궁극적인 클라이언트는 하나님이시다. 즉 마치 변호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시키는 심부름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의뢰인인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그분을 돕고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즉 의뢰를 받은 대로 일해야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하거나, 스스로 보기에 좋은 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궁극적인 주인은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주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와, 기타 프로그램과 모든 펠로우십과 봉사와 사역의 중심은 주인이신 하나님이셔야 한다. 비록 우리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섬기고 있으며, 그분의 심부름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신의 교회의 주체로 참여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의뢰하신 것이다. 편의상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리더십을 세우고 직분을 두게 되었지만, 모든 교우들은 직분이나, 신앙의 배경이나 연조와 상관없이 모두가 다 동일한 한 가족이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두 주체의식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이미 여러 번 강조했듯이, 교회는 결코 '예배하는 구조' 정도로 정의할 수 없다. 교회를 예배 드리는 조직으로 축소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주인 의식이 사라지고, 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인도하는 사람은 몇 사람에 국한되고, 나머지는 그저 예배 "보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고 만다. 특별히 인격적인 교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숫자가 커진 경우, 이는 더욱 불가피한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최' 측이 차려놓은 순서나 프로그램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참여했다가 [주관적인 평가와 더불어] 흩어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교회의 클라이언트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의뢰를 받은 자들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된다. 물론 Staff(직원)들이 시간을 더 내고, 봉사의 수고를 더 많이 감당해야 하지만, 그들은 회중 전체의 결정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일군일 뿐이며, 결코 주인이 아니다. 교우들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들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푸른 목장의 교우들은 예배든 펠로우십이든 봉사든, 더욱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또 하나님의 심부름을 감당하는 진짜 교인(교회의 주인, 적어도 그 주인의 의뢰를 받은 자들)이 되어야지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아무도 주인의식이 없이 목회자(들)의 독단에 끌려 다니거나, 아니면 향방없이 표류하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설교 본문 연구: 마 16:13-20 (7.6.08)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수살렘으로 향하시기전, 즉 마태복음의 전반부의 결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고 계신다. 이 질문은 단순히 사람들의 당신에의 인식에 관한 질문을 넘어선 ‘믿음’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우리의 신앙이 어떤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대답위에, 베드로의 고백위에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이 시점은 특별히 성경전체에 있어,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온 첫번째 교회에 대한 언급이다. 다시말해 본문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생각이 어떤한것인지 알수 있는 중요한 장소인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8-20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교회는 무엇인가?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모습은 다음의 다섯가지로 발견된다.
1. 신앙 고백위의 교회Church on the confession (18)
2. 주의 백성의 교회Church as God’s people (18)
3. 영원한 교회Church of immortality (18)
4. 천국의 일꾼인 교회Church of mission (19)
5.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 Church of Christ’s blood (v 20)
사도 바울은 이 다섯가지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종합하여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우리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교회는 나에게 부담인가? 소명인가? 고통인가? 사랑인가? 쉼터인가? 세상살이의 일부인가? 나의 머리속에 있는 교회가 아닌, 내가 몸담고 있는 내 삶의 일부로서 교회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교회의 무엇인가? 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인가?

2008년 7월 3일 목요일

퍼뮤니케이션: 미주한인교회를 위한 새로운 신학의 필요성

역사상으로 이주공동체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되어왔다. 서구의 역사 신화들에서 이러한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도리스인들은 고향인 중부유럽을 떠나 그리스에서 헬라 문명을 만들었고, 패배한 트로이를 탈출한 아이네아스와 그의 동족들은 이탈리아에서 로마 문명을 형성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탈출한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찬란한 미국 문명을 꽃피웠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주를 할 때에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반대로 과거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독일인 막스 베버와 프랑스인 알렉시스드 토크빌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을 부러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주민 사회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이 사고방식에 의존해 단단히 굳어져있는 지배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수 백 년이 지나 새로운 기득권구조가 형성되기 전에는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사회 체제를 구성할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고향을 떠나 힘든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신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미주의 한인들, 특히 한인 교회들은 이주민에게 부여하는 신의 은총을 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졌던 출향의식과 객지에 와서 고향을 그리는 귀향의식이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로 서로 충돌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유롭고 풍요한 땅에 와서 그토록 구태의연한 한국식의 교회생활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미주 한인 교회가 융성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아쉬운 일이지만, 현재대로라면 미주 한인 교회의 몰락은 시간의 문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교회는 한인 이민 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왔다고 하겠다. 사실 미주 도착에서 정착까지 아마 교회 신세를 지지 않은 이민자들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어느 이민공동체 보다 교회 중심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이제 젊은 지도자들은 떠나고 신도들은 교회의 과도한 요구에 괴로워하고 있다. 이민 교회들조차 한국 교회식의 권위주의, 성장주의, 근본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현재 그 수가 줄어들고 있는 한국 교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쇠퇴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다. 특히 미국 사회가 이민 초기 사회의 장점을 상실하고 기득권층 중심의 수구사회로 재편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때문에 전후에 누려오던 국제적 지위도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매개의 변증법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만일 미주 한인 사회가 미국 초기의 자유로운 다원적 공동체라는 이상을 재현할 수 있다면, 미주 한인들은 미국에 새로운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의 다원성과 잘 결합하기만 한다면, 한국인들의 공동체성을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는 이러한 자유로운 다원적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한인 교회는 한국식의 권위주의, 근본주의, 성장주의 신학을 버려야 한다. 자유와 인애가 넘치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한사람으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기윤실 소식지 2008-5, 백종국ㅣUCLA 교환교수, 한국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경상대학교 교수)

설교 본문 연구: Col 2:1-10 by Oliver Schulz

1. Danger after graduation
- Real (2:8)
- Potent (2:8)
- Through Philosophy and empty deception (2:8)
Cf. 1Tim 6:20, Pr 1:7, 9:10

2. Natures of the hostile world
- According to the tradition of men (2:8)
- Elementary principles (2:8)
- Contrary to Christ (2:8)
Cf. 1Cor 1:18-20; Rom 1:21-22

3. How to Defense?
- Be on the Alert (2:8)
- Know Christ (2:6-7, 9):
- Christ (2:6)
- Lord (2:6)
- God (2:9)
- Consequently (2:7)
- Know Sufficiency of Christ (2:3, 6, 9-10)
- All Wisdom and Knowledge (2:3 cf. 1Cor 2:7-8)
- Completeness (2:10)

다음 주 말씀: 오경석 전도사
그 다음 주 말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길 (막 8:27-38)
그 다음 다음 주 말씀: 언약에 따르는 복과 저주(신 28)
그 다음 다음 다음 주 말씀: 언약을 새롭게 하자!(수 24:14-18)

선교지 소식: 이스라엘에서 김홍근 선교사 가족

5년 간의 제 2기 사역을 마치고 안식년을 위해서 내일 이스라엘을 떠나게 됩니다. 몇 주 동안 집 정리, 사역 정리 등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짐을 싸며, 정말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들었던 이곳을 또 다시 떠나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었습니다.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은 성도들이 마음 아파하였고, 목회자들과도 송별회를 통해 아쉬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6월 한 달은 정말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의 비자 거부가 되고, 안식년을 보낼 곳이 갑자기 캐나다로 바뀌는가 하면, 사역 비전의 수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학교 마지막 수업 날,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 같을 때, 노아와 샤론이 친구들과 부둥켜 안고 서로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서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머물고 싶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저희의 바램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비자를 받지 못하여 떠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제 2기 사역을 마무리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략) 일 년 안에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었지만, 곧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저를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 사역에 관련되도록 하셨습니다. (중략) 이 사역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역이며, 예수 믿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준비하는 사역입니다.

특히, 현재 이스라엘에서 단순히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수많은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고,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6세의 한 청소년이 종교인들이 보낸 폭탄 박스를 모르고 뜯었다가 터져서, 거의 죽을 뻔 하는가 하면, 성경퀴즈 대회에서 출전한 한 예수 믿는 여학생은 종교 유대인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압박과 위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설립하려는 학교는 이러한 아이들을 보호하여, 강건한 주님의 군사로 성장할 때까지 보호하고 훈련하는 주님의 사관학교의 역활을 하고자 합니다..

(중략) 이 사역을 위해서는 약 8백만 불의 재정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물가가 서유럽의 물가와 거의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금액을 보았을 때,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 사역은 결코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행하셨습니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철통 같은 여리고 성을 무지렁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무너뜨리시지 않았습니까? "쌀눈"이라고 무시 받는 동양인인 저를 통하여,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 개의 유대인교회를 하나님께서는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이 모금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와 함께 사역하는 현지인들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해외에 나와 있는 관계로, 저의 주된 사역 중의 하나가 되게 되었습니다. (중략)

저의 안식년을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학교 설립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기윤실 소식: 전 미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교우들에게

저희 L.A. 기윤실(Christian Ethcal Movement: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은 지난 1999년부터 2002년 사이에 중국 동북 지역에서 여러보로 탈북자들을 돕는 운동을 해왔습니다만, 이제는 중국이 아닌 미국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현재 미국에는 약 200명 가량의 탈북 동포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들은 2004. 10. 18 연방의회에서 가결한 북한인권법(The North Korean Human Right Act of 2004)을 철저히 믿고 미국 망명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4월 이민 항소위원회(The Board of Immigration Appeals)는 '이민 입국 전 제 3국으로 정착했다가 들어온 난민들의 경우에는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킨다'는 조항을 들어 망명 요청을 보류했습니다. 탈북 동포들은 미국으로 바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한국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탈북 동포들이 망명 신청을 낸 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200명이 넘는 탈북 동포들 중에서 미국 정부에게 선택된 몇 명만이 영주권을 받고 나머지는 불안한 신분으로 힘겹게 타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신분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운전면허 시험을 볼 수도 없거니와, 망명신청서를 내고 180일 뒤에 나오는 노동허가증이 나오긴 하지만, 미국 망명 신청을 함과 동시에 한국 주민등록 번호가 말소되어 취업 서류를 준비하는 것조차 어려우며, 병원 치료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는 이들을 돕기 위해 북한인권법의 올바른 시행을 촉구하는 진정서(Petition)을 관련된 입법 기관과 관계자들에게 보내고자 합니다. 별첨한 진정서에 서명하셔서 이 일에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입법기관에 보내지는 진정서의 숫자가 정해진 한도에 다다르면 입법기관에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서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탈북 망명자의 지위확보에 더 큰 힘을 실을 수 있게 됩니다. 자유를 찾아 중국을 거치고, 한국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온 탈북 망명 동포들의 눈물을 함께 닦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시고, 기도로 또 헌금으로 성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www.cemkla.org)

설교 본문 연구: 민 20:1-13 모세의 불신과 실수

1. 모년(? 아마도 광야생활의 만년) 정월에 이스라엘 자손이 도착한 광야는 어디인가? (1절) 미리암의 죽음/장사는 암시적으로 뭔가를 시사한다고 하겠다.
2. 기본적인 욕구(물의 공급을 포함한) 충족이 안되자 이스라엘은 또 다시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며 그들과 다투기(므리바) 시작하였다. (3-5절) 그들의 말 속에 스며들어 있는 불신을 헤아려 보라. 그들에게 없다고 불평하는 것의 목록을 살펴보라! (5절)
3. 그들의 비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 백성을 인도한 목적이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4절)
4. 모세와 아론은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6절)
5. 그 때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6절하)
6.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라. (8절)
7. #6과 비교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찾아 내 보라.(10-11절)
8. 모세와 아론의 불순종은 결국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리고 결국 그 불신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된 것은 무엇인가? (12절상)
9. 이 일로 말미암아 모세와 아론에게 닥친 결과는 무엇인가 (12절하)
10. 이로써 궁극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무엇인가? (13절)

다음 주 말씀: 졸업 및 진급 축하 (Oliver 전도사님)

목회 칼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에게

갑작스러운 저의 사임 "소식"에 저으기 놀라셨을 줄 압니다.

특별히 처음 소식을 접한 형제 자매들에게 송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제 자신이나 우리 교회의 현주소가 사실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교회 식구들 전체 앞에 내어놓고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며 또 가장 확실한 방법일텐데, 실행위원회로 축소하여 결정 과정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사안의 독특성이 있었지만 아마도 제 믿음의 부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한 것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겠습니다만, 이번의 의사 결정도, 사실 갈등상황을 전제로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가기로 하면, 우리 교회가 당분간은 어수선함을 견뎌야 할 것이 분명하고, 이곳에 있기로 하면 한국의 선교단체가 계속 방치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을 보면서, 말하자면 어차피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 앞에서 덜 송구스러운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욕심 같습니다만, 간절히 소망하기로는, 우리 교회도 주님의 교회요, 한국의 단체(학원복음화협의회)도 하나님의 기관인 만큼,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당신의 종들을 이리 보내기도 하고, 저리 보내기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시며, 또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나이에(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무슨 큰 영화를 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구, 더구나 무슨 큰 이득을 챙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주인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이 종된 이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만, 아직은 우리 교회가 약간은 불안정한 상황에 있는데, 하필 이 시점에서 이런 부르심을 받들어야만 하는 것이, 제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염려하는 바를 아실 터인즉,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어렵고 힘든 터널을 지나게 되겠지만, 잠잠히 그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의지할 수 있기를 빕니다.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긴급 기도 요청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께,

한 가지 긴급 소식과 함께 기도 부탁을 드립니다.

다름 아니라, 김흥영-김성주 집사님의 아들 벤저민군이 이라크에 파병되어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지난 주일에 테러리스트에 의한 차량전복 사고가 발생하여 발목 골절상을 입고 후송되어 수요일 저녁 현재 수술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의료진들의 진단으로는 걷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벤군의 생애의 이 시점에 특히 개입해 주시고, 또 수술과 회복의 모든 과정에 친히 함께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아울러서 김흥영 집사님과 김성주 집사님의 심령을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손을 신뢰하고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우리가 주님의 온전한 형상을 덧입고 아름답게 변화되도록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경륜에 이 모든 상황을 맡기기 원하며,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중보해 주시길 다시 한번 당부하며, 이만 줄입니다.

권 영석 올림

2008년 6월 16일 월요일

목회 칼럼: 하나님의 인도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지도책이나 설계도처럼 미리 보여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미리 알게 해 놓으셨다면, 우리는 저마다 힘든 길을 피하여 쉬운 길로 가기 위해 애쓸 것이며, 그리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심한 설계도를 이탈하여 도리어 트러블을 만들 것이며, 소위 성공가도로 보이는 프리웨이는 트래픽 때문에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면에서 크게 균형을 잃고 있다. 즉 일부 직업 영역에는 사람들이 심하게 몰리는 반면, 어떤 영역에는 사람들이 너무 모자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걸어온 여정을 뒤돌아볼 때라야 선명해진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훤히 미리 보여주시지는 않지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세심한 손길로 한 걸음씩 인도해 주셨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 가운데서 한 걸음씩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비록 그 모든 여정을 한 눈에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란 물론 과거의 사건이 바탕이 되지만, 그러나 장래를 염두에 둔 개념이다. 하나님의 인도는 사실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뭔가 잘 보여야 하고, 그럴듯한 망원렌즈를 준비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믿음이요, 순종을 각오한 신뢰이다. 인도하시는 것은 그분이 하실 일이오, 우리의 할 일은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몇 가지 통로를 통해 당신의 인도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으셨다. 예를 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기준과 가치에 배치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경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받았는지를 보면 그분의 인도하시는 지침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이나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사랑어린 충언들을 거룩한 지식으로 덧입혀 주시고, 사물의 이치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환경을 통해서 마지막 확증을 주신다고 하겠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하면서 '믿습니다'라고 해도, 실제로 여건이 조성되고, 환경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될 수 없다. 사람이 계획은 세우나, 궁극적으로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그분의 인도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히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장래의 모든 일들을 세세히 알 수는 없지만, 더 먼 장래의 일은 이미 확실히 알고 있다. 즉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우리가 그분처럼 변화되어 온전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때로 잘못 결정하고 실수를 저지를 때가 분명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담대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지 소식: 이스라엘에서 온 소식

“And he said, I am God, the God of thy father: fear not to go down into Egypt; for I will there make of thee a great nation: For I will go down with thee into Egypt; and I will also surely bring thee up againí▒

Dear Partners,

Our God is awesome! I got a message from my attorney saying few days ago that our petition for Green Card has been just approved. Thanks for your prayer for us. Finally we can apply our Green Card to enter to the States. However, there is still long way to go. The application process of Green Card will take around 1 year. It menas that we still need to stay out of the States for another year. However, the toughest barrier has been overcome. For now, we can't come to the States, and can't stay in Israel, either. Our request for visa in Israel has been rejected. Therefore, we have decided to go to Canada. This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decisions we have ever made in our life. We are leaving from Israel at June 23rd, and will move to Toronto in the end of July. We hope to come back after year to Israel if God is willingíª We had a serious discussion with the World Partners, our mission board, what to do. For now, it seems to us that Canada is the best option because Korea can't be either our option. Most of my contacts are in the States.

Then, God has suddenly opened a door to Canada. World Partners Canada, our sister organization, has agreed to accept me as their staff. No one of our administration team couldn't believe what they heard from them because the World Partners Canada has been separated due to a Canadian law long times ago. Now I can recruit Canadian brothers to be a part of Godí»s ministry in Israel!

Furthermore, we've gotten a promise of the Lord while we had staff prayer meeting of our congregation. God has given me a word; He will go with me, and will bring me back to Israel as described at Gen. 46:3-4. This is our hope and prayer.

Nevertheless, in reality, we are facing a great challenge in our life. Canada is completely a foreign country for us. It is quite different than the States. We have to start everything from scratch. However, we trust God. If this is His will, he will prepare our way to Canada. Ií»m sure He has a plan for us to be there. Somehow, I'm exciting to see what God will do with us in Canada.

I can't, however, ignore the hardship that my kids are passing through. Please, pray for us. Pray for our two daughters. They are now under the great stress. They have been moving among three schools in three years. I see what turmoil of emotional transition they are facing. They have been loosing the best friends almost every year. It makes them sick and tired. Our first daughter, Noa, is now a teenager. It is turbulence for her to face this transition every year. Please, pray for Noa and Sharon for having smooth transition and adjustment to a new environment.

It is a great transition time not only for me, but also for many others around me. First of all, our new congregation, Tehilat Ya, will be without us for a while. Ií»m sure that the congregation has been founded upon Yeshua, not on me. Therefore, God will lead them. The congregation has been growing fast. Now it is time for them to stand by themselves. Pray for the congregation, and for the local past, Michael Yaron.

Thanks for your prayer and support for us.

Blessings from Kimí»s family in Israel.

설교 본문 연구: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긍휼 (출 33:1-34:9)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당신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한 까닭은?(33:3, 5)

2. 이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33:4)

3. 이스라엘 백성이 단장품을 제한 것(4절)/하나님께서 이를 제하라고 하신 것(5절)은 무엇을 염두에 둔 행동일까? (참조: 32:2-4)

4. 진 밖에 친 회막에 나아간(33:7-11) 모세가 하나님 앞에 요구한 사항은 한 마디로 무엇인가? (33:12-14)

5.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33:14)

6. 모세는 하나님의 이 약속에 쐐기를 박기 위해 언약의 내용을 다시 거론한다. 33:15-16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라. (참조: 19:4-6상)

7. 모세는 이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 앞에 한 가지를 더 구하게 된다. 무엇인가? (33:18절)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면서 선포하신 이름의 의미/내용은 무엇인가? (33:19, 34:6-7)

9. 여호와를 알현한 모세는 어떻게 반응하였는가(34:8), 그리고 어떻게 기도하였는가(34:9)

10. 우리는 여호와(여호와의 이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의 백성이 된 우리의 삶에 어떻게 반향되고(echo/ reflection) 있는가?

다음 주 말씀: 민 20:1-13 모세의 불신과 실수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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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9일 월요일

퍼뮤니케이션: 광우병 본질은 민심 이반

군중은 우매한가? 비합리적이고 선동에 놀아나는 폭도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보화의 산물 중의 하나로서 영리한 군중(smart mobs)이 생겨난다. 인터넷과 휴대폰을 소지한 현대의 군중은 정보의 공유를 통해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사회 제반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고독한 군중'이 아니라 참여하는 군중이다.

참여군중의 행동양식은 '신속과 연대'다. 이들은 인터넷이나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익명의 군중을 하나로 묶는다. 또한 단시간에 대중을 동원한다. 이런 행동을 통해 선거나 여론형성 등 정치문화의 변화를 선도해 간다.

그러나 참여군중의 사이버 행동주의는 양날의 칼과 같다. 빛과 어둠이 상존한다. 대중의 힘을 신장시키기도 하지만 익명성과 즉흥성과 파괴성으로 인해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약이자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음모론이다. 광우병 괴담 사태는 반미좌파의 선동 탓이라는 것이다. 즉 좌파의 국정발목잡기이자 반미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략이 먹혀 들어가 철없는 청소년이 부화뇌동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이념문제로 보려한다.

둘째는 실책론이다. 이번 사태는 검역주권 포기와 졸속협상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이 방미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국민복리와 직결된 사안을 안이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념문제가 아니라 정책문제라는 입장이다.

불만족한 심리상태가 누적되면 집합행동을 유발시키게 된다. 상승된 기대감이 꺾이는 변곡점에서 군중소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현정부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인사파동과 정책혼선에 대한 민심을 소 닭 보듯 외면한 결과다. (진구섭 맥퍼슨대 사회학과 교수, 중앙일보에서 퍼옴)

설교 본문 연구: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출 32)

1. 이스라엘 백성이 엇나가게 된 표면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1절)
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숨겨져 있던 불안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1절)
3. 우상을 만들고 섬기게 되는 우리 현대인들의 동인과 궁극적인 동기는 어떠한가?
4. 금송아지 상은 무엇을 재료로 만들어졌나? (2절) 금송아지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4절)
5.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다른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른 형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4절 하). 형상화의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결국 어떻게/어떤 형상으로 축소되고 말았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은 결국 무엇을 숭배하게 되었는가? (1, 4, 5, 6절)
6. 이 사건은, 가히 선악과 사건에 방불한 크고 중대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의 파장은 한 마디로 얼마나 심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7-8절)
7.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정서를 추측해 본다면? (7, 9-10, 12-14, 33, 34-35절)
8.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겪게 되었던 심경의 변화를 추정해 보라. (11-13, 19-20, 21, 27, 30-32절)
9.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과연 용서하실 것인가, 아니하실 것인가? (33장 이하 참조)

다음 주 말씀: 언약에 재헌신하시는 하나님 (출 33)

목회 칼럼: 존재와 소유를 혼동하는 현대인들

인류 역사의 갈등과 투쟁은 한 마디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 동산에서 축출된 이후, 우리 인간들은 존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유에 매달려왔다. 즉 소유의 확장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인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 안의 부패로 인한 한계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만큼, 우리 바깥의, 외부적인 환경을 극대화함으로써 우리의 내적인 한계를 상쇄하려고 애쓴 셈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헛수고였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인간이라는 존재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데다, 더구나 하나님 없이 버려진 인간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당신의 동역자(co-creator; vice roi)로 다시 불러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이런 복귀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우리 자신은 이미 일그러져 있으며, 부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저 냄새를 덮고, 추한 것을 가리는 정도일 뿐, 그야말로 우리의 의는 기껏해야 '누더기' 같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존재는 소유로 대체하거나, 소유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그런 피상적인 차원에서 결코 되찾아질 수 없는, 참으로 진지하고도 엄숙한 실존이오, 그야말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실재이다.

따라서 존재와 소유, 이 둘 사이에 우선순위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소유보다는 존재가 먼저여야 한다. 소유로는 존재를 복구할 수 없지만, 존재만 확실하면 소유는 언제든 또 복구가 가능하며, 또 소유는 복구가 안된다 해도 그것으로 [존재에 비하면] 무슨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회복시키사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소유의 문제 역시 필요가 있는대로 다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바로 이런 믿음의 대전제 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존재없는 소유만을 추구하기 위해 골몰하고 염려하지 않겠다고 하는 우리의 각오를 서원드리는 믿음을 고백하고 아뢰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주님의 기도를 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처럼 결국 존재도 소유도 다 잃어버리는 가련한 인생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2008년 6월 5일 목요일

사진 보내주시면...

오른쪽에 있는 슬라이드에 올려놓을께요.

슬라이드에 나오는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 많이 많이 보내주세요~!!

2008년 6월 2일 월요일

이번 수양회에서 찍은 사진있으신 분들...

사진을 올려주세요.

올리기 힘드신 분들은 제게 보내주세요.

그러면 대신 올려드리겠습니다.


omdchung@gmail.com

설교 본문 연구: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귀히 보시는 하나님의 긍휼(눅 15:11-32/ 마 6:19-34)

1.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12절)
2.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형편은 어디까지 비참하여졌나? (15-16절)
3. 이 아들이 돌아올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들은 이제 아들의 신분이 아니라 어떤 신분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 (눅 15:17)
4. 집나간 이 아들을 본 아버지는 이 아들을 어떻게 여겼나? (20절)
5. 아버지는 이 집나간 아들을 여전히 어떻게 대우하는가? (22-24, 32절)
6. 맏아들은 이 동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30절)
7. 아버지와 큰아들의 시각 차가 이렇게 다르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8. 하나님께서 만일 이 큰아들의 관점으로 우리를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9.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둘째아들처럼 대해 주시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언제인가?
10. 이 땅을 사는 동안 염려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염려를 길게 연장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또 우리의 [죄인된] 이웃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11.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시는가? (마 6:33) 고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참조: 마 23:25-26)

다음 주 말씀: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출 32)

2008년 5월 29일 목요일

수양회후기...

(우선 모든 일정을 위해 준비하시고 수양회 기간 동안 수고해주신 목사님들과 강사님들, 그리고 모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후유증에서 편해질듯 하다.

평소 안하던 운동을 몇시간동안이나 몰아서 했더니 몸은 여기저기 안쑤시는데가 없었고, 비교적 가까운 곳이였어도 짧은 일정으로 다녀오다보니 내몸이 내몸이 아닌듯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수양회가 내겐 휴식이였고, 유익이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집을 떠나 바뀐 잠자리가 어찌 편할까마는, 그래도 즐겁다고 느끼고 재미있었다고 생각되는건, 설교와 강의가 주었던 즐거움 때문이 아니였나 싶다.

특히, 삶에 대한, 일에 관한 내 생각들을 다시 돌이켜보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더 뿌듯한 마음이 드는게 아닐까...

목장모임에서 공부하고있는(5목장에서 교제를 선택해서 공부하고 있는) 내용들과 어느면에서는 많이 연결이 되었다고나 할까...목장모임에서 고민하던 내용들이 조금은 클리어해진듯한 느낌이다.

이런것이 아마도 도전이 되지 않나 싶다.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해야할 일도 많고, 하고싶은 일도 많으니까...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전교우 수양회에서 만납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금년에도 온 교우들이 함께 수양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여의치 않은 여건이지만 이렇게 출발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무엇보다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모래부터 시작되는 수양회를 앞두고 몇 가지 공지사항과 당부사항을 전합니다.


1. 이번 토요일 새벽기도회는 생략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와서 기도하실 분들은 나오셔도 됩니다.)

2. 준비물 가운데, 특별히 침낭과 베게 잊지 마시고, 수영복도 챙겨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온이 평년보다 낮기 때문에, 도톰한 옷도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3. 중고등부 티모씨의 침례식이 주일 오후 2시에 수영장에서 있겠습니다.

4. 출발시간: 토요일 11:30까지 캠프장에 도착하시는 것을 목표로, 밸리지역에서는 10시쯤에 출발하시면 되겠습니다. (캠프장 안내 전화, 현 사무엘 집사님 818-438-7341; 안영준 집사님 818-642-1261)
그리고 주일날 오실 분들은 강태휘 집사님과 함께 carpool하실 수 있겠습니다(주일 오전 9:00 교회 파킹장, 참고: 강태휘 집사님 연락처: 818-849-0058)

부득이 참석이 어려우신 분들도 계시는 줄 압니다. 한 마음으로 수양회 위해서, 특별히 강사들과 소그룹 리더들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고, 온 교우들이 일상 속에서 구원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고 또 실천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럼, 수양회 장소인 오하이에서 만납시다.

권 영석 올림

2008년 5월 22일 목요일

5.18.08 말씀과 삶 강의: Fear of God

5.18.08 말씀과 삶 강의: Fear of God


Click here to watch 'Fear-of-God-51708'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2008 전교우 수양회 소그룹 편성표 (가안)

권오진 <노동과 직업>

정범수-김성원, 김충일-김경애, 현명희, 이은진,

권오은, 현혜원, 최보희, 이혜경, 임주희,

강태휘-강은숙, 이용규-이숙영, 김준엽-김난정

오경석 <노년기 인생의 지혜와 과제>

이창희, 김창경, 김복기, 임현숙(임기석),

염윤-염화실, 이수영-이향영,

진용진 <이민 1-2세 전환기의 갈등과 과제>

김흥영-김성주, 이정춘, 전덕수-전월림, 안영준,

현사무엘, 이동기,

출발 시간:

금요일(Youth Group) 출발시간: 3:30 PM, @Oliver's house: 19509 Rinaldi St., Apt. # 59

토요일 출발 시간: 10:00 AM 교회 파킹장. (개인적으로 오시는 분들은 중식을 위해 11:30까지 도착하시는 것을 목표로 하시기 바람) 캠프장 direction 안내: 현 사무엘 집사 818-438-7341; 안영준 집사 818-642-1261)

주일 아침 출발시간: 9:00 AM 교회 파킹장 (강태휘 집사: 818-849-0058)

선교지 소식

샬롬. 안녕하세요. 이스라엘입니다

지난주는 이스라엘이 독립 60주년 환갑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독립 60주년을 맞아 많은 나라들의 정상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축하해주는 것을 보며, 이스라엘 국제적인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나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오늘이 있게 한 하나님을 잊어 간다는 것입니다. 60주년을 맞아 이스라엘 국회 의사당에서 치러진 기념식에서 국회의장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오늘날의 존재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똑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정말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에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박해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폭탄 박스를 선물로 받은 아리엘 교회 목사님 아들, <아미> 뿐만 아니라, 아라드 시, 브엘쉐바 시, 이제는 심지어 가장 박해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아코 시에서까지 박해의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전국 성경 퀴즈 대회에서 한 예수 믿는 유대인인 여고생이 가장 앞선 성적으로 최종 결승에 오르자, 종교인들이 대회 자체를 보이코트 하겠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교육부 장관까지 이유 없는 짓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들은 그 여학생이 예수님을 믿는 한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이 아닌 학생이 출전하는 성경퀴즈대회에 나올 이유가 없다며,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 교회들이 이제는 예배 때마다, 경비를 세워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언제 종교인들이 쳐들어와 폭행을 하거나, 테러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숙하는 만큼, 국민의 신앙과 사회도 성숙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믿음의 자유가 주어지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난주에 이곳 비자국에 비자를 연장하러 갔다가, 거부당하고 왔습니다. 5년 이상은 못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0월 초까지만 연장을 해주더군요. 아직 영주권이 해결되지 않아 미국을 입국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7월 말까지 영주권이 나오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비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할지 잘 결정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1년만 나갔다오면 다시 5년 체류하는 것은 아무런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중략)

늘 기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샬롬

김홍근 드림

목회칼럼: 일상 속에서 역사하는 우리의 구원!

일상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깨닫기 위해 일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일상을 떠나지 않고는 우리의 일상을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실존적인 역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이번 주말에 시작하는 2008년도 전교우 수양회, 카운트 다운에 들어갑니다. 바라기는 온 교우들이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경험하는 놀라운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또 온 교우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격의 없는 친교를 맛보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부득이 참석이 어려운 교우님들은 주일 하루만이라도, 은혜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번 수양회는 소그룹 활동을 주요 골격으로 하는 만큼, 교우들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사랑도 나누고 고민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본문 연구: 출 20:18-21

1. 시내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것은 무엇인가?

2. 십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도 꼭 같은 광경들을 본 것으로 보아(19:16-19), 이들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언약규정을 말씀하시는 동안 줄곧 이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광경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정서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3.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언약규정에 주목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방식으로 전달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결국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경험한/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첫 마디는 무엇인가?

5.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6.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려운 방식으로 임하신 까닭/목적은 무엇인가?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은,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하는 교육적인 목적이 들어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 참조: 3:1-3)

7. 신약 성경에서 시내산 사건에 방불한 사건을 찾는다면? 참조: 10:19이하, 12: 18-29.

8. 우리의 중생의 경험은 가히 하나님에 대한 이런 경외심을 촉발시켰다고 하겠다. 이런 경외심이 언제 어떻게생겨났는가?


다음 주 설교: 일상 속에서 역사하는 우리의 구원!

2008년 5월 17일 토요일

본인이나 주변에...

mp3 또는 wma로 녹음가능한 녹음기나, mp3플레이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번 수양회에 꼭 가져오시길 바라며, 이곳에 가져오시겠다고 확인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2개가 확인되었고, 앞으로 적어도 3개가 더 필요합니다.




If anyone has a 'MP3 Player' with voice recording feature, please bring it to this upcoming retreat.

It is going to be very useful when we have small group seminars.

We need at least five of them and there is only 2 available so far.

Thanks for ur cooperation.

2008년 5월 15일 목요일

5.10.08 말씀과 삶: Who is the Holy Spirit

5월 10일 08년
말씀과 삶 강의 녹음 링크 올립니다.


외부에 올려놓고 링크를 걸어놓으니,

아래를 클릭하시면 자동으로 연결되어집니다.

시도해보시고 아래에 덧글로 평가 해주세요.



Click here to watch 'who-is-the-holy-spirit-51008'

2008년 5월 12일 월요일

설교 본문 연구: 출 20:12/ 엡 6:1-3

1. 십계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2. 5계명은 이 두 번째 부분의 서론 격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서론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3.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이란 어디를 가리키는가?

4. 레위기 19:3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대신, 어떤 동사로 말씀하셨는가?

5.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의 위치는 그만큼 절대적이라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6.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그리 오래 살지 못한 것을 보면, 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이 언약관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 (참조: 15:4-6)

7.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70인역을 인용하여 이 계명을 반복하고 있다. "주 안에서"를 첨언한 까닭은 무엇일까? (참조 엡 5:21)

8.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대신 '잘 되고, [그냥]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한 것은 어떤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일까?

9.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자녀들을 사랑하기 위해( 6:4), 더욱 힘써야 할 부분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다음 주 말씀: 언약백성의 반응(20:18-21)

목회 칼럼: 어머니 마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일생을 아낌없이 자식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마음...

양주동 선생의 <어머니 마음>이다. 그야말로 어머님의 마음보다 더 넓은 마음, 어머님의 사랑보다 더 거룩한 것이 이 땅에 있을까? 우리는 다 이런 어머니 ''으로 태어나서, 어머니의 희생을 먹고 자랐으며, 어머니의 사랑으로 사람이 된다.

그래서 훌륭한 자식 뒤에는 [] 훌륭한 어머니가 계신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이다. 오직 자식의 교육을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했던 맹자의 어머니나, 자식의 교육을 위해 좋은 학군을 찾아 다니는 이 시대의 치맛바람을 비교하기는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매 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암으로 투병중이시던 어메의 마지막 1, 체류신분 때문에 출입국이 자유롭지 못해, 차일피일하다가 결국은 장례식의 영정사진으로 마지막 이별을 해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할수록 불효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무슨 대단한 미션을 감당한다고 마지막 임종도 못했으니, 마음에 서운함을 안고 떠나셨을 어메를 생각하면 무슨 염치로 효도를 운운하며 설교를 할 것인가?! 그야말로 옛 시인 정철의 선견지명이 새록새록 진실하게 느껴진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랑 다하여라

떠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요한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어머니를 부탁하시던 주님의 마음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쉬움과 회한이 많았으리라. 허나, 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생겨났으니, 우리 교회 안의 새로운 식구들을 자식처럼, 어머니처럼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고 보살펴 드리도록 하자.

선교지 소식: 안녕하세요? 몽골입니다.

북경에 다녀와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30일짜리 비자 종료일이 저만치 멀리 있어도 첫날부터 하루 해가 지는 것이 아깝고 그랬었습니다. 516일에 종료가 되는데, 다시 국경을 넘어 몽골 관광비자를 받아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차 스케줄 상 이번 주말(511일 밤)에 몽골을 떠나 몽골-중국 국경지대인 에렝으로 다녀오려고 합니다. 514일경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30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북경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 길의 반 정도만 가면 되기 때문에 그리 힘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경지대이고, 초행길인데다 북경에서처럼 회사 식구들이 맞아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조금 긴장이 됩니다.

417일에 몽골에 다시 입국해서 오늘까지 저희는 사무실에는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인 외국인 관리청 직원이 불시에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네요. 노동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그렇게 적발되면 사실 후일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어쩌다가 알게 된 분의 도움으로 어제 드디어 외국인 등록청 비자 총 책임자(사라)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 등록청 사람들은 저희의 상황을 빤히 알 정도로 그들 사이에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고, 사라도 저희 여권의 복사본을 보더니 바로 알아봤다고 합니다. 사라의 말이, "이 두사람이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엔지오에서 엔지오 지정활동외에 종교활동을 추가로 하다가 적발되었고, 그렇게 엔지오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학생, 교수, 노동 기타 여러가지 비자로는 입국이 불가능하고, 다만 종교 비자로는 신청이 가능하다."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정리된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박에스더 같은 경우 학생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몽골에 입국하는 사람들 중에 종교비자를 받은 사람은 소수이고, 종교 비자를 받으려면 종교단체에 소속된 노동자여야 하는데, 국가에서 종교단체 허가를 많이 내주지 않고 있어서 많은 분들이 엔지오로 등록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 저희가 사라의 말을 듣고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종교활동을 하려거든 아예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저희는 이제 그런 부분에서 이미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비자를 받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내일 저희는 두달 만에 집을 또 다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FCS 건물에 1년치 세를 내고 살면서 FCS 재정(수리비 관련)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명목으로 살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상황 상 저희가 사는 건물을 팔아야할 상황에 놓여 저희도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자 문제도 결정이 안된 상황에서 이사를 가는 것이 여러가지 면에서 힘들고, 집을 구하기도 쉽지가 않았는데, 잘 되서 내일 이사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다리차도 엘리베이터도 없이 3층에서 물건을 내려서 5층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이니 보통 일은 아닙니다. 이삿짐센터는 물론 없구요. 차량부터 사람까지 모두 저희가 일일이 섭외를 해야 하는데, 다행히 아는 분을 통해서 섭외가 되었습니다. 내일 이사를 잘하고, 다음주에 중국에 잘 다녀올 수 있도록 마음과 손을 모아주세요. 그럼.. 바나바와 소피아 드림.

2008년 5월 8일 목요일

5목장모임 5.10.08 토요일 오후 6시 30분입니다.

김흥영, 김성주 집사님 댁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2008년 5월 7일 수요일

[책] 여성 멘토링의 영적 비밀 (캐롤 브래조)

Divine Secrets of Mentoring (Carol Brazo)

멘토, 멘토링의 개념에 대하여 아직도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내게 이 책은 그간 인식하지 못하고 맺어온 자매들과의 관계가 신앙 안에서 진정한 멘토링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내용이 어렵지 않고 수필 형식인데, 읽는 내내 참 마음이 따뜻했다.

저자는 성경 속의 여인들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재구성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자매들 사이의 멘토링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있다.
저자가 나누는 모든 일화들이 성경적으로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판단까지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된 자매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소망’과, 상대를 내 몸의 한부분 같이 생각하는 ‘사랑’ 때문일 것이다.

< 소망품기>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은, ‘멘토’라는 개념에서 떠오르는 위계질서나 권위, 가르침, 권면 등의 딱딱한 이미지가, 특히나 자매들 사이에서 또한 자매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얼마나 낮아지고 부드러워지는지 느끼게 하는 문단으로 끝난다. 특히 형제들에게는 너무나 유치하고 어쩌면 사소하게 들릴지 모르는 내용이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소망, 그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일하심을, 축복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이 행진을 진두지휘한다. 이 일에는 항상 여성들이 앞장 서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관계를 세우는 사람들인데, 축하로써 그 관계들을 세운다. 우리는 축하의 연결 고리로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아름다운 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결혼식과 졸업식, 생일 축하 잔치와 결혼 기념일 등을 계획한다.
슬픔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우리에게 특권으로 주어진 삶을 여전히 축하해야 한다는 사실로 서로 위로한다. 육체는 땅에 묻고 영은 아버지께로 보내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삶의 기쁨을 축하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소망을 축하한다. 소망을 가르친다. 소망을 살아낸다.”

그리고 저자는 “멘토는 친구라는 말이다” 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끝 맺는다.
나이와 신앙의 깊이의 차이가 많아서 나를 이끌어 주는 멘토도 생각이 나지만, 알게 모르게 내 인생의 여정에 소중한 멘토가 되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앞으로 나도 또한 어떠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멘토가 되어야 할지 다짐해본다
.

2008년 5월 5일 월요일

전교우 수양회 안내

푸른 목장 교회 2008 전 교우 수양회

일상 속에서 역사하는 우리의 구원!

Work out your salvation in everyday life!

5/24() 11 AM - 5/26() 3 PM

주일 예배 10:30-12:00

Forest Home, Ojai Valley

655 Burnham Rd.

Oak View, CA 93022

805)649-3356

주제강의 (I): 이동기 목사

주제강의 (II): 권영석 목사

소그룹별 주제:

노동과 직업 (권오진 성도)

데이트와 결혼 (이순화 전도사)

노년기 인생의 지혜와 과제 (오경석 전도사)

이민 1-2세 전환기의 갈등과 과제 (진용진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