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7일 토요일

권영석 목사 근황

사랑하는 교우님들에게,


그동안 적조하여서 송구합니다. 그간도 주님 안에서 여상하시겠지요? 주님의 크신 은혜가 날이 갈수록 더욱 크고 놀랍기만 합니다.


다 름 아니라, 저는 그동안 정들었던 ‘푸른 목장 교회’(L.A. 북쪽의 밸리 지역의 교민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의 ‘학원복음화협의회’ 사역을 위해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학복협은 지난 20여 년간 국내의 대학생 선교 단체들과 지역교회의 대학부들을 아우르는 매개역할을 해 온 일종의 연합체 성격의 협력단체인데, 상임대표로 수고하시던 이승장 목사님께서 은퇴하신 후 후임자를 물색하던 중 제게 요청이 오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선교단체와 지역교회 둘 다를 봉사했던 저의 경험이 학복협 사역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 민교회의 열악한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겪은 저로서 선뜻 고국행을 결정할 수 없어서 수개월 동안 갈등과 기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주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야하는 것이 종의 소임인 만큼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아직 교회의 후임 목회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임하게 되어 한편 부담이 됩니다만, 주님께서 이 곳 교회도 친히 돌보시리라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리더십(실행위원회와 청빙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한 국에 부칠 짐들을 싸고, 이곳의 집을 줄여서 딸 아이(오은)의 학교 인근의 아파트로 옮기는 작업을 막 마쳤습니다. 현실적으로 아이들과 헤어져서 지내야 하는 문제, 한국에 들어가서 새로이 거처를 마련하는 문제, 더욱이 그간의 변모한 한국 상황을 따라잡는 일 등 쉽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주님께서 한걸음씩 인도하시리라 믿고, 모험의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이 모든 전환의 과정에서부터 주님과 동행하며, 잘 감당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귀국한 후에 다시 알려드리기로 하고, 우선 저희의 미국내 연락처(전화/주소)가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개인정보인 주소와 전화번호는 이곳에 게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메일로 직접 받아보신 분들도 많이 있으시고 해서 그리하였습니다. 따로 권목사님의 연락처가 필요하신 분께서는 저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omdchung@gmail.com)

2008년 9월 8일 월요일

설교 본문 : 행 18:1~11

1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2008년 9월 5일 금요일

목회 칼럼: 지난 세월을 회고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푸른 목장 교회에 청빙 요청을 수락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또 작별을 고하게 되고 보니, 참으로 미안하고 송구스럽기도 하고 또 아쉽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유구무언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지만, 칼럼란을 빌어서 몇 가지 회한을 정리함으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저와 저희 가족을 한 식구로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밸리와는 별 인연이 없던 저희였지만, 더운 날씨와 기괴한 바람소리가 이제 그리 낯설지 않게 된 데는 여러분의 우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 줄 압니다. 부모님처럼 따뜻이 대해주시던 권사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허물없게 대해 주시던 형님들과 누님들, 순박하고 순수하던 또래의 집사님들, 동생같고 조카 같이 따르고 존경해 주던 손아래 형제 자매들... 제가 베푼 것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허나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전형적인 이민자로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기에 이민자의 애환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태생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저의 가르침과 목회활동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원론적이었으며, 여러분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제 가슴 한 구석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는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제 생각은, 지금도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굳게 믿지만, 대다수의 교우들에게는 너무나 이상적이요 꿈같은 얘기로 들리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게 됩니다.

이 외에도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한 두 가지겠습니까마는, 하나님께서는 지난 3년 세월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제게나 여러분에게나, 하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는지,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마땅히 어떤 모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으매,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비록 당장 가시적인 변화로 드러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도전해 주셨던 바를 꼬옥 붙드시고, 또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들어 순종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여러분 개인에게나 우리 교회 위에 지혜를 주시고, 더욱 새롭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예상치 않았던 갑작스런 부르심으로 정들었던 교회와 교우들을 생이별하게 된 이 송구스러운 일이, (여러분에게도 황당스러웠겠습니다만, 제 자신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계기가 되기를 간구하렵니다.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곧 전환기 이민 사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훌륭한 목자를 새로이 보내 주시고 세워주셔서 그 동안 부족했던 일들을 보완하여 주심으로 우리 푸른 목장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지고 밸리지역 일원에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는 참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해 주실 줄로 믿고 모든 것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신 손에 의탁하렵니다. 아울러서 저와 저희 가족들을 또 요긴하게 사용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아 한국의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귀중한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저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언제일는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은 소중히 간직해 주시고, 섭섭하고 유쾌하지 못했던 기억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 털어 내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2008년 8월 31일 권영석 올림.

설교 본문 연구: 십자가에 못 박힌 믿음의 선배 바울

(고후 11:16-12:10/ 구체적인 case: 고전 9:1-27/행 20:33-35)
1. 바울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결국 무엇을 일컫는가? (11:16-17)
2. 이 세상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어리석은 자들”, 곧 스스로 자랑하는 자들을 도리어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그리스도인(‘주를 따라 자랑하는 자’) 들의 본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랑을 늘어놓으려 하는(11:21- 12:1) 까닭은 무엇일까?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11:23, 참조: 10:10)
3. 바울은 안팎으로 고난을 당했다. 내적으로 받은 바울의 스트레스는 무엇 때문인가?(11:28) 이는 결국 고린도 교회에 속한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겠는가?(11:29)
4.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의 대표적인 예로써 다메섹 탈출 경험(11:32-33)을 언급한다. 이것이 어떻게 바울의 약함을 드러내어 주는 예가 될까?
5. 12:1-4의 경험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울이다. 그런데, 왜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6. 바울은 왜 이런 압도적인 체험을 배제하고 도리어 자신의 가시로 말미암는 연약함을 부각시키려 애쓰는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찾아 보자.(12:6, 9- 10)
7.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사람이다(참조: 13:4).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또 우리가 처한 일상에서 어떻게 바울의 기본원리(12:10b)를 살아낼 수 있을까?
다음 주 말씀: 작별의 슬픔과 소망 (행 20:17-38)

목회칼럼 : 자기 부인-세상의 연줄을 끊어버려라!

인생은 어딘가/누군가에 소속하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이다.
그러나 절대자 하나님의 품을 떠난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보일지라도, 기껏해야 상대적인 존재 곧 또-다른 “불안한 존재”에 우리의 소속/충성을 맡기고 살아야 하는 풍전등화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전설적인 영웅이나,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지도자라 해도, 결국은 여전히 불완전한 인생일 뿐이며, 우리의 안전을 영원히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는 소유/돈이나, 권세/빽, 인기 등과 같은
이 세상의 파우어도 궁극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은 못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적인 파우어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든 그 세를 불려야 하고, 연루된 사람들을 실타래처럼 더 많이 규합해 나가야 한다. 이런 세 싸움에서 손쉽게 힘을 규합할 수 있는 방법이 소위 연줄을 잡는 것이다. 그러나, 강부자나 고소영 같은 학연, 지연, 혈연, 교연 등의 “연줄”은 피차간의 필요가 맞물려 있는 동안은 강력한 본드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어느 한 쪽에서 필요의 수명이 다하면, 그야말로 줄 떨어진 연처럼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서 피차가 소외되고 만다. 그래서 이 연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폭력을 휘둘러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들거나(violence), 그 폭력을 피해가기 위해 조종/기만(manipulation) 함으로써 관계를 팽팽히 긴장시켜야 한다.
세상은 이것을 훌륭한 ‘매니지먼트’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런 식의 매니지먼트는 본질에 대한 관심은 제쳐두고, 끊임없는 야합과 이합집산의 이전투구를 반복하도록 할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은, 다름 아니라, 이런 식의 연줄을 끊어버리고, 이 세상적인 매니지먼트를 중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 참되신 하나님께 소속하게 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더 이상 이런 위협과 조종의 방식을 좇을 필요가 없다. 도리어 뭇사람(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누구든지, 심지어 원수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 인격의 바운데리를 지켜주며, 나아가서 손해를 보더라도 서로 불쌍히 여겨서 헤아려 주고, 용납해 주고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
사실 하늘 나라의 막강한 파우어를 모두 지니신 우리 주님께서 하늘 나라의 모든 연줄을 끊어버리고 철저히 낮아지심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도리어 전혀 파우어 형성에 도움이 안되는 죄인/세리/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지 않으셨던가! 아마도 주님께서 자신의 힘을 더욱 굳히고 과시하시기 위해 연줄을 규합하고자 하셨던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감생심 그분의 측근 그룹에 접근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자기 부인이란, 이처럼 이 세상적인 안전과 파우어의 연줄을 끊어버리고, 도리어 이 세상을 “피하여”(counter-walk: 역행하여) 우리 주님의 모범을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vulnerable)한만큼,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기시며 챙겨주실 것이다.

퍼뮤니케이션

친구에게 (2)

여보쇼 친구여, 수고가 크구려.
부모형제 떼어놓고,
자식 위해 교육 위해,
낯선 땅을 찾아왔는데,

지나온 길 돌아보오.
어른 말씀 순종하는
아들 하나 키워놨는가?
부모 마음 알아주는
딸내미나 하나 있는가?

이웃과 사회 위해 나누고 희생을 할 인물이오
나라와 민족 위해 달려나가 줄 인물이오.

허허 어쩌나,
낳은 자식은 있는데 키워 놓은 자식은 없을까 하오.

하늘 위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수많은 자손 위에 우리가 해가 되어 준다면,
밤의 별처럼 한낮의 모래처럼 반짝이고 빛내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출까 하오.

(신호범, 기윤실 특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