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1일 목요일

퍼뮤니케이션: 아는 놈/ 친구에게(1)

“아는 놈야?”
“모르는 놈인데?”
턱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 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
모르는 놈이다. (김연승,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친구에게 (1),

여보쇼 친구여, 고생이 많구려.
밤도 낮도, 허리 펼 새도 없이 일하고 돈 벌었는데,
허리 펴고 한 번 돌아보오.

앞집 코큰 아저씨와 악수나 한번 나눠봤는지
뒷집 뚱보 아줌마랑 통성명이나 하였는지?

언덕 위의 저택에서 가라오케 파티 열고
캐딜락 스피커에선 흘러간 옛 노래 흥겨운데,

허허 이러다간 끼리끼리 한민족
꼴불견의 한 민족 될까 하오.

타국 땅 비치는 외로운 저 달은
어릴 적 고향 초가 위의 그 달이 분명한데,

이 땅도 내 땅 삼고, 타민족도 내 이웃 삼아,
가꾸고 사랑함이 어떨까 하오. (신호범, 기윤실 강의 중)

목회칼럼 :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신 주님의 은총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백성으로 구별된 것은 우리가 특별해짐으로써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별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 속에 오심으로써 된 것이다. 즉 우리가 특별히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도, 우리가 특별히 거룩해졌기 때문에 된 것도 아니다. 오직, 거룩하신 그분께서 거룩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 속에 오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우리 스스로 이런 koine(보통, 속된, 더러운, 쌍<常>스러운) 상태를 벗어날/초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오,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이런 코이네 상태로 낮아지심으로, 도리어 우리의 모든 일상이 그분과 동행하는 가운데 거룩하게 변하게 해 주신 은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요, 이런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도(백성)들이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 모든 구석구석이 이제는 새로워졌고 의미있는 것으로 변화되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매일 같이 대하던 밥 한 공기, 어김없이 찾아오는 출근 시간이 새로운 까닭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가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소유하셨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일상의 모든 시공간에 오셔서 우리의 일상을 ‘거룩’케 하시는 그분과 기쁘게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상을 제쳐두고 무슨 신령한 체험이나 의식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거룩케 하려던 이전의 발상과 lifestyle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새로운 position/identity와 그에 걸맞은 lifestyle로 사는 걸음마를 연습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의미없이 또는 도리어 허황하고 되지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허우적대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identity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lifestyle을 익혀 나가야 한다.

아침에 단잠에서 깨어나서, 커피한잔과 함께 하루를 여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모든 만남과 관계들, 직장의 반복되는 일과와, 식구들과 둘러앉아서 서로 서로 감사하며 축하하는 저녁 만찬, 그리고 하루의 창을 닫는 고요한 저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일상이, 그분과 동행하는 가운데 새로운 의미로 가득하고 은혜와 감사로 충만한, 거룩한 일상이 되게 된 것을 실제로 경험(actualize)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부인의 삶은, 분명 이처럼 이전의 경건치 않은 세상의 정욕을 향해 “안돼”라고 말하는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우리의 허무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하여, 주님 안에서 다시 지음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모든 일상을 보람있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신나고 신비스러운 여정을 의미한다.

Always thank God and be satisfied in Christ Jesus our Lord.

설교 본문 연구: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눅 10:25-37)
1.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질문한 의도/동기는?(25절) 이 질문이 어째서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었을까?

2. 예수께서 어떻게 이 질문의 공을 다시 율법사에 넘기시는가?(26절)

3. 율법사가 율법에서 읽은 내용에 기초해서 제시한 대답은?(27절)

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27절)

5. 예수께서 칭찬하시면서 '그대로 행하라'고 하자, 율법사는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29절). 이 두 번째 질문의 저의는 무엇일까?(29절)

6.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이 비유의 요점은 무엇일까?(36-37상절)

7.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지나간 것과 사마리아인이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 준 것을 대조해 볼 때, 그 차이는 결국 어디서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31-35절) (참고: 당시 가난한 사람이 기본 숙식을 해결하는데 하루 1/12 데나리온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2 데나리온은 24일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다.)

8.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어떤 교훈을 받았을까? 특히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음을 고려해 보라. (참고: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에 버금가는 금기사항이었다.)

9. 비유 속의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런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웃으로서 곤궁에 처한 이웃에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영생을 이미 얻은 우리는 더더욱 '이웃'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가?

다음 주 말씀: 십자가에 못박힌 자로 산 믿음의 선배 바울
(고후 11:16-12:10/ 고전 9:1-27/ 행 20:33-35)

2008년 8월 11일 월요일

설교 본문 연구: 신령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잘못된 구분(막 7:1-23)

1. 예수께 접근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내려 온 사람들인가? (1절)
2. 그들이 제기한 문제,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은 것(2, 5절)이 뭬 그리 문제인가? (3-4절)
3. 이들을 향해, 예수께서 다짜고짜 인용한 예언서의 내용은? (6-7절)
4. 이에 비추어 볼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9절, 특히 6절의 "교훈을 삼아"에 주목하라.)
5. 예수께서 그 근거로 더 제시하신, 시범적인 사례로 제시한 예는? (11-13절)
6. "정결예법"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보라. (15-16절)
7.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께서, 이 원리를 한 단계 더 비약적으로 적용하시고 있는 내용은? (18-19절, 특히 19절 하반절; 참조: 행 10:14-15, 28, 11:8-9, 21:28, 롬 14:14, 히 9:13, 10:29)
8. 20-23절에서 예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제는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을 말씀하신다. 그 목록의 내용을 열거해 보라.
9. 이런 [고의적인] 악한 생각들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의 유전이 이런 악한 생각들을 바로잡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무엇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까?

다음 주 말씀: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눅 10:25-37)

선교지 소식: 작은 불꽃 소식

"Be a Timothy, Make a Timothy!"

이 캐치 프레이즈는 8.11-15 우크라이나의 흑해 해변 니콜라이에서 실시하는 우크라이나 디모데 아카데미 08년 여름 훈련의 주제입니다. '디모데가 되고, 디모데를 만들자'는 우리 선교회가 중앙 아메리카 3개국에서 열매를 거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배출하는 사역의 캐치 프레이즈이며 동구라파의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장차 중앙 아시아를 포함한 러시아 언어권의 제자화 사역을 향한 대망의 도전입니다.

이번 5일간의 실전사역은 지금까지 훈련시킨 초급 제자들에게 실전을 경험시켜, 배운 바 말씀이 성령께서 인간구원을 위해 사역하시는 생명 그 자체이며, 훈련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오늘도 강력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역을 통해 5-10명의 초급 장교급 지도자들이 부상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가 인원은 70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일인당 미화 100불 예산을 세웠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개방된 젊은이들은 우리처럼 자유롭게 돈을 벌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훈련장에 오는 장거리 열차 비용과 5일간의 숙식과 장소 대여비 모두를 계산하여 현지에서 1인당 100불로 계산한 것입니다. 훈련을 위해서는, 훈련생이 있어야 하고, 전문적인 훈련자가 있어야 하며, 소요 경비가 조달되어야 하고, 훈련에 필요한 좋은 자료를 준비하고, 전체적인 진행을 종합적으로 수행할 재능를 가진 경험있는 스태프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크라이나의 우리 훈련은 항상 "기적" 가운데 공급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우크라이나입니까? 제 자신은 오랜 동안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바드의 역사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오래 전에 쓴 '문명의 충돌'에서,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하는 것이 바로 여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를 가르면서 흐르는 아름다운 드네프레 강이라고 하면서, 그곳을 무시무시한 동서 문명의 충돌 지점이라는 씨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러시아의 총리 푸틴은 만일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충동질하여 러시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정책을 고집한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동과 서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주님의 제자 안드레가 핍박을 피해 복음을 전한 곳, 815-885년 사이에 콘스탄틴 성을 가진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의 슬라브어 문자화와 선교 사역, 999년 이해 블라디미르로 인한 러시아 정교회국가로 부상하게 된 오랜 동안의 기독교 문화, 서방 카톨릭과 동방 교회간의 미묘한 관계는 비록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러시아 정교회의 원조국이지만 아직도 그 유산이 보존되도록 해 왔던 민족, 한국 민족처럼 스탈린 시대 전부터 전 세계에 해외 국민을 많이 가지고 있는 가슴에 눈물진 한을 갖고 사는 민족, 한국 전쟁 때는 젊은이들이 쏘련군으로 와서 목숨을 버리고 간 민족, 인구 4700만의 이 긴 기독교 역사의 명목상의 기독교 국가로 변해 버린 나라..., 다만 뭔가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장차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여 러시아어권과 전 세계에 선교사들을 많이 (마치 한국 교회처럼) 보낼 나라인 것만은 보입니다. 이 일에 우리를 사용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놀랍습니까? 계속하여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십시오. (이순정 목사 올림)

목회 칼럼: 다시 교회를 생각한다.

가정이 해체되고, 커뮤니티가 뒤틀려 있거나 아예 사라져 가고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떠난 이 땅의 인간들이 입은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커뮤니티 없이,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될 수도 없고, 도리어 기괴한 모습의 인간들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던 까닭은 분명 바로 이런 절박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그래서 교회를 두고 주님의 가정이오, 새로운 커뮤니티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역교회들은 이 땅의 커뮤니티 부재와 뒤틀린 커뮤니티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이 땅의 커뮤니티보다 도리어 더 칙칙한 색깔을 띄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일까? 우리를 궁극적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기구도, 인간적인 지도자도, 트렌디한 설교나 음악이나 또 어떤 프로그램도, 그럴듯한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조차 참된 커뮤니티로 꾸리지 못하는 까닭은, 건물이 시원찮아서도, 조직이나 기구가 없어서도, 지도자가 나빠서만도, 프로그램이 없어서도, 사명선언문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 그 마음을 본받아서 서로 서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낮아지려는 마음, 서로 귀하게 여기고 보듬으려는 마음,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殺身成仁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도리어 여전히 내가 유익을 얻고, 내가 대접을 받고,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남보다] 잘되어야겠다는 마음,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키고, 헐뜯기까지 하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우리는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다름 아닌 주님의 몸, 곧 주님의 마음이 신경과 핏줄처럼 연결되어 온 몸에 고루 퍼져서 그 영향력을 나타내는 커뮤니티이다. 교회 창립 35돐을 맞아, 과연 우리 개개인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새로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인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주님의 마음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매듭과 옹이는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성육신하시기까지 우리를 보듬으신 우리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세워나가자. 그리하면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설교 본문 연구: 엡 2:1-10 자기를 부인하는 삶: 뒤바뀐 인생의 목표

1. 바울은 이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상태를 한 마디로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죽은 상태에 놓이게 된 까닭은 무엇때문인가? (1절)
2. 그 때 우리의 삶의 양태는 어떠했나? (2-3절)
3.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무엇에 근거하여서인가? (4절)
4. 5-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연합]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세 가지 동사는?
5. 바울은 이 세 동사를 다 과거 시제(aorist)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의미와 강조점은 무엇일까? (물론 미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감안해야 한다. 참조: 롬 8:15과 23절을 서로 비교해 보라.)
6.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연합시켜 주신 것(연합한 것으로 count해 주시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7절)
8. 8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구원인가, 은혜인가?
9. '우리는 그의 만드신/창조하신 바'라는 말은 다시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요약해 준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바, 우리를 새로이 창조하신(참조 고후 5:17, 갈 6:15) 목적은 무엇인가?(10절, 참조 1:4)
10. (에베소서 전체의 문맥에서) "선한 일"은 어떤 일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참조: 빌 2:13)

다음 주 말씀: 자기를 부인하는 삶: 신령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잘못된 구분(막 7:1-23)

목회 칼럼: 목적이 분명한 인생

누군가 이민생활을 빗대어, 빌빌(bills after bills)하는 인생이라 했던가?! 그러나, 어찌 페이먼트 하다가 인생이 끝나서야 쓰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목적 있는 인생"(Purpose-Driven Life)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면,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성경은 구체적인 목표를 획일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이면 누구나 지향해야 할 공통적인 가치들(core values)을 제시한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조물주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 이웃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사람보다 돈이 더 대접을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가치에 따라 인생의 목표를 정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도리어 "어리석은"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기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 만하신 분이 또 있으랴?! 비록, 무지한 세상은 그의 죽음을 '개죽음'이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선적인 가치를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셨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따라 죽으심으로써, 우리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또 우리에게 참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요구하신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허비하게 되는 주된 까닭은, 이처럼 뚜렷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채, 그저 이 시대의 풍조/가치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안목이 이 세상의 물질적인 쾌락에 온통 사로 잡혀 있는 이상, 敬天愛人의 고상한 가치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며, 고상하지도 보람되지도 않은 부끄러운 종말을 향해 방황하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목장 교회 교우들은 그저 빌빌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목적있는 인생이 다 되도록 하자. (2005년 10월 30일 주보에서)

2008년 8월 1일 금요일

퍼뮤니케이션: 이 민족은 무엇인가?

떠나라, 그 말씀 순종하고 모두 버렸습니다.
부모도 친구도 앞산의 진달래도, 담밑의 봉숭아도 모두 버렸습니다.

가라, 그 말씀 좇아 건너건너 왔습니다.
산도 강도, 바다에 눈물 뿌리며 건너건너 왔습니다.

중국사람처럼 요리솜씨가 없어도,
독일사람처럼 과학자가 못되어도,
일본사람처럼 기술자는 아니어도
이 민족은 새날 밝도록 기도하고,
내일의 소망 가운데 견디는 오직 믿음,
믿음입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아 새벽 이슬 옷깃적시며
달려나갈 오직 교회,
교회는 소망입니다.

마지막 명령 따라 땅끝까지 사명 다하는 오직 주님,
주님은 사랑입니다.
되리라!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케 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신호범 박사, 2007. 4. 28 L.A. 기윤실 특강 중)

설교 본문 연구: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 "어떻게"의 문제 (7.27.08)

롬 8:1-17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어째서 정죄가 없게(1절) 되었는가?(2절)
2. 우리는 육신의 한계로 인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3절).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율법의 요구가 다 충족되도록
해 주셨는가? (2절, 3-4절)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누구의 인도를 따라 살게 되었는가? (4절, 14절)
4. 육신대로 생각하고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는커녕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5-8절)
5.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제 육신에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속하게 되었는가? (8-9절)
6. 성령은 생명의 영, 곧 살리는 영이기에(10절, 각주 참조)
영에 거하는 사람들은 장차 어떤 것까지 바랄 수 있게 되었는가? (11절)
7. 이런 성령을 소유한 자들의 lifestyle은 이제 더 이상 육신에 굴복하여 육신,
곧 하나님없이 지내던 이전처럼 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또 살아서도 안된다 (12절). 도리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3절)
8. 우리가 받은 성령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누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는가?(15절)
따라서 우리에게는 무슨 권리가 있는가?(16-17절)
9. 이런 우리들에게 고난이 수반되는/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17절, 28-30절)
다음 주 말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 모범생 선배들 (고후 11:16-12:10)

목회 칼럼: 용서는 event가 아니라 과정이다. (7.20.08)

용서의 비결은 긍휼에 있는 것이지, 화술이나 대인관계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창고에 무상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간만 잘 모면하면 되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순간이겠지만, 용서에는 그런 결심보다 훨씬 더 많은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용서인 구원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회복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과 매한가지이리라. 하나님께서도, 사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으며, 용서의 때를 정하시고, 그것을 선포하셨으며,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적반하장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회복된 관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여전히 [천상에서] 중보하고 계시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용서도, 견책(rebuking) - 회개와 고백 - 용서의 선언 - 관계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절차가 제대로 갖추어져야 그 과정이 마무리된다. 수직관계 중심으로 신앙을 배운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한 대목에 이르면 이내 난처해지고 만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더욱이, 관계가 깨어졌을 때에,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먼저 견책(rebuking)의 책임을 요구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즉 온갖 gossip으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당사자/가해자에게 찾아가서, '내 boundary가 침범을 당했노라', '내가 심히 불쾌했노라'고 알리는 주도권을 피해-당사자가 행사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형제 자매를 비판하여 내치기(judge-away)보다는 도리어 긍휼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먼저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서로 함께 형제 자매가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지사지에 힘입어서,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끝까지 응하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도리어 discipline할 것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한 몸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healing power가 있다. 이 power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나 고독과 소외의 병을 시름시름 앓을 것이며 물기없는 나무처럼 생기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 본문 연구: 천국 백성의 Basic life-style: 십자가의 자기부인 (7.20.08)

막 8:27-38, 10:45

1. 막 8:33-38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하셨나? 왜 그런가?
2. 여기서 베드로가 저지른 잘못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논리로 추구할/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전혀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어떻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3. 나는 과연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가? 만일 베드로의 말처럼 주님께서 만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4. 막 10:32-34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이 메시아로서 당할 일을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이상 노골적으로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뭔가 심히 불편하였을 것이다(참조: 9:31-32).
5. 이는 여전히 허황한 요구를 하고 있는 요한과 야고보의 비정상적인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예수님과 identify하는 것(주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38절)
6. 다른 제자들이 격분한 것을 보면(41절), 다들 한통속으로서 동일하게 허황한 꿈을 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꾼 꿈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7.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은 무슨 꿈인가?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허황하고 황당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되짚어 보라.
8. 결국 열쇠는 우리의 왕으로 오신, 곧 하나님 나라의 임금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lordship style에 대해 제자들은 전혀 상반되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9.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천국 백성의 lifestyle에 대한 이해차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갈등이 있다면?
10.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께서 이런 lifestyle을 사셨다면, 우리가 그리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우리의 old lifestyle은 우리 자신은 물론 이 세상을 결국 파멸로 이끌 것이 아닌가?!
11. 참고로 사도 바울의 lifestyle이 어떻게 우리 주님의 lifestyle을 모방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참조: 고전 10:31-33)

목회 칼럼: 용서의 출발점 (7.13.08)

용서의 출발점은 뭐니뭐니해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라 하겠다. 뭔가 부당하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분노와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어하는 복수심은 우리 인간의 지극히 정상적인 정서요, 이런 정서적인 센서가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관계가 깨어진 데(Boundary Issue)에 대한 인식조차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의 센서가 인식하는 [fair-unfair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용서와 관계 회복에 이르게 해 준다.

사실, 긍휼로 넘어서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 긍휼은, 상황이나 여건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물리적 정서적인 타격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처지를 감안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겠다는 각오요 태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 언약적인 긍휼의 씨앗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표현된 것이며, 결국은 우리의 배역한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런 긍휼을 맛본 자들, 이런 긍휼의 수혜자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따라서 성도의 가장 으뜸가는 본분은 바로 이 긍휼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실제적으로 더욱 알아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 큰 긍휼에 기초하여 우리도 서로 간에 작은 긍휼을 반향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주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일만 달란트의 은혜에 기초하여 백 데나리온의 은혜를 베푸는 삶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의 비결은 긍휼에 있는 것이지, 화술이나 대인관계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긍휼이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긍휼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긍휼히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으니, 하나님은 긍휼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우리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서 서로서로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셨다면,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 긍휼의 창고에 무상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이 긍휼의 비밀 열쇠를 주저하지 말고 사용하는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자.

설교 본문 연구 (7.13.08)

용서 받은 성도의 제일가는 본분: 용서하는 삶 (마 6:12/ 18:15-35)

1.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 즉 하나님에 관한 기도와
우리 인간의 필요에 관한 기도로 나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크게 3가지로 나누셨다. 그 중 한 가지가 용서에 대한 것이다. 용서의 문제가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가? (참조: 14-15절)
2. 사실 우리의 일용할 [육체적인] 양식의 문제 역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용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3. 그런데, 이 기도에는 단서 구절이 붙어 있다. 여기서 “같이”란,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무슨 뜻인가?
4. 7:1-5은 용서에 대한 기도의 해설판이라고 할 수 있다. (cf.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의 해설판이 6:19-34인 것처럼) 즉 주님께서는 서로 OO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가?
5. 우리가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비판하기 전에 왜 먼저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만 할까?
6. 마 18:15-35의 비유를 빌자면, 주님께서는 우리 눈의 들보(일만 달란트)를 제거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백 데나리온)를 보고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7.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 역시, 서로 서로 죄를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다. 18:35와 6:14-15의 상응성을 생각해 보라.
8. 18:15은 회개의 책임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있지만, 견책(rebuking)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9. 용서의 문제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18:18-20). 혹 오늘날 우리의 관계가 교회 안에서마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이 말씀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 주 말씀: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길 (막 8:27-38)

목회 칼럼: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7.6.08)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얼른 생각하면, 교회는 당연히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교회는 불신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의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 얘기는 확 달라진다. 교회의 궁극적인 클라이언트는 하나님이시다. 즉 마치 변호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시키는 심부름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의뢰인인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그분을 돕고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즉 의뢰를 받은 대로 일해야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하거나, 스스로 보기에 좋은 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궁극적인 주인은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주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와, 기타 프로그램과 모든 펠로우십과 봉사와 사역의 중심은 주인이신 하나님이셔야 한다. 비록 우리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섬기고 있으며, 그분의 심부름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신의 교회의 주체로 참여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의뢰하신 것이다. 편의상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리더십을 세우고 직분을 두게 되었지만, 모든 교우들은 직분이나, 신앙의 배경이나 연조와 상관없이 모두가 다 동일한 한 가족이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두 주체의식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이미 여러 번 강조했듯이, 교회는 결코 '예배하는 구조' 정도로 정의할 수 없다. 교회를 예배 드리는 조직으로 축소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주인 의식이 사라지고, 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인도하는 사람은 몇 사람에 국한되고, 나머지는 그저 예배 "보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고 만다. 특별히 인격적인 교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숫자가 커진 경우, 이는 더욱 불가피한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최' 측이 차려놓은 순서나 프로그램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참여했다가 [주관적인 평가와 더불어] 흩어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교회의 클라이언트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의뢰를 받은 자들이다. 여기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된다. 물론 Staff(직원)들이 시간을 더 내고, 봉사의 수고를 더 많이 감당해야 하지만, 그들은 회중 전체의 결정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일군일 뿐이며, 결코 주인이 아니다. 교우들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들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푸른 목장의 교우들은 예배든 펠로우십이든 봉사든, 더욱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또 하나님의 심부름을 감당하는 진짜 교인(교회의 주인, 적어도 그 주인의 의뢰를 받은 자들)이 되어야지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아무도 주인의식이 없이 목회자(들)의 독단에 끌려 다니거나, 아니면 향방없이 표류하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설교 본문 연구: 마 16:13-20 (7.6.08)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수살렘으로 향하시기전, 즉 마태복음의 전반부의 결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고 계신다. 이 질문은 단순히 사람들의 당신에의 인식에 관한 질문을 넘어선 ‘믿음’과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우리의 신앙이 어떤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대답위에, 베드로의 고백위에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이 시점은 특별히 성경전체에 있어, 그리고 특히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온 첫번째 교회에 대한 언급이다. 다시말해 본문은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생각이 어떤한것인지 알수 있는 중요한 장소인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8-20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교회는 무엇인가?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모습은 다음의 다섯가지로 발견된다.
1. 신앙 고백위의 교회Church on the confession (18)
2. 주의 백성의 교회Church as God’s people (18)
3. 영원한 교회Church of immortality (18)
4. 천국의 일꾼인 교회Church of mission (19)
5.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회 Church of Christ’s blood (v 20)
사도 바울은 이 다섯가지 교회의 본질과 특징을 종합하여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우리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교회는 나에게 부담인가? 소명인가? 고통인가? 사랑인가? 쉼터인가? 세상살이의 일부인가? 나의 머리속에 있는 교회가 아닌, 내가 몸담고 있는 내 삶의 일부로서 교회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는 교회의 무엇인가? 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