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9일 월요일

목회 칼럼: 존재와 소유를 혼동하는 현대인들

인류 역사의 갈등과 투쟁은 한 마디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 동산에서 축출된 이후, 우리 인간들은 존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유에 매달려왔다. 즉 소유의 확장을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인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 안의 부패로 인한 한계는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만큼, 우리 바깥의, 외부적인 환경을 극대화함으로써 우리의 내적인 한계를 상쇄하려고 애쓴 셈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헛수고였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인간이라는 존재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데다, 더구나 하나님 없이 버려진 인간이라는 치명적인 한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당신의 동역자(co-creator; vice roi)로 다시 불러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이런 복귀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우리 자신은 이미 일그러져 있으며, 부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저 냄새를 덮고, 추한 것을 가리는 정도일 뿐, 그야말로 우리의 의는 기껏해야 '누더기' 같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존재는 소유로 대체하거나, 소유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그런 피상적인 차원에서 결코 되찾아질 수 없는, 참으로 진지하고도 엄숙한 실존이오, 그야말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실재이다.

따라서 존재와 소유, 이 둘 사이에 우선순위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소유보다는 존재가 먼저여야 한다. 소유로는 존재를 복구할 수 없지만, 존재만 확실하면 소유는 언제든 또 복구가 가능하며, 또 소유는 복구가 안된다 해도 그것으로 [존재에 비하면] 무슨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회복시키사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소유의 문제 역시 필요가 있는대로 다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바로 이런 믿음의 대전제 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존재없는 소유만을 추구하기 위해 골몰하고 염려하지 않겠다고 하는 우리의 각오를 서원드리는 믿음을 고백하고 아뢰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주님의 기도를 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비유하신 어리석은 부자처럼 결국 존재도 소유도 다 잃어버리는 가련한 인생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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