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일 금요일

목회 칼럼: 용서는 event가 아니라 과정이다. (7.20.08)

용서의 비결은 긍휼에 있는 것이지, 화술이나 대인관계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창고에 무상으로 출입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간만 잘 모면하면 되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순간이겠지만, 용서에는 그런 결심보다 훨씬 더 많은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용서인 구원이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회복의 과정을 수반하는 것과 매한가지이리라. 하나님께서도, 사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으며, 용서의 때를 정하시고, 그것을 선포하셨으며,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적반하장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회복된 관계와 교제를 나누기 위해 여전히 [천상에서] 중보하고 계시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용서도, 견책(rebuking) - 회개와 고백 - 용서의 선언 - 관계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절차가 제대로 갖추어져야 그 과정이 마무리된다. 수직관계 중심으로 신앙을 배운 우리는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한 대목에 이르면 이내 난처해지고 만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더욱이, 관계가 깨어졌을 때에,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먼저 견책(rebuking)의 책임을 요구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즉 온갖 gossip으로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기 전에 먼저 당사자/가해자에게 찾아가서, '내 boundary가 침범을 당했노라', '내가 심히 불쾌했노라'고 알리는 주도권을 피해-당사자가 행사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형제 자매를 비판하여 내치기(judge-away)보다는 도리어 긍휼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먼저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서로 함께 형제 자매가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지사지에 힘입어서,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끝까지 응하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도리어 discipline할 것을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교회 공동체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 한 몸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healing power가 있다. 이 power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나 고독과 소외의 병을 시름시름 앓을 것이며 물기없는 나무처럼 생기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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