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7일 월요일

목회칼럼: 대리모(surrogate mother)의 희비극

지난 주 뉴스 위크에는 이상한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었다.대리모 출산(수정란을 대리모의 자궁에 안착시켜서 길러내는 방식)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들이 미국에서만도 1년에 천명 이상이라고 한다. 신체건강한 20대 산모들, 특히 군인의 아내들이 대리모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지금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족보존의 본능을 탓할 수는 없겠으나, 자신이 낳을 수 없는/또는 낳기 싫은 출산을, 대리모의 자궁을 빌어서(“임대료는 당연히 내겠지만) 굳이 자신들의 자녀를 가져야겠다는 욕심, 특별한 일도 없이 남편을 기다려야 하는 군인의 아내들이 소일거리(?) 삼아, 내지는 뭔가 남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꿩먹고 알먹고 식의 욕구가 조우한 셈이다.

아이를 태안에서 양육하는 일은 주 7일 하루 24시간 꼬박 열달을 일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할 때, 그들이 받는 돈(2만불 전후)은 미니멈도 안된다는 얘기들이 나오는가 하면, 낳는 순간부터 남보다 더 멀어져야만 하는 이상한 관계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라는 얘기들도 한다.

인간의 과학적인 발견과 기술문명이 점점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하나님의 손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영역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실험되고 또 조종되게 되었다. 성감별만 해도 그렇다.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청춘 남녀 사이의 불균형적 비율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만일, 이것이 동물의 세계에 국한된 이야기라면, 누가 문제를 삼겠는가? 가축의 품종을 증진하기 위한 암수의 비율 조정이나, 육종학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사실, 수의학은 인간의 생명공학보다 4-50년 정도는 이미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소위 창조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영혼이 걸린 문제이기에, 우리는 적어도 인간의 출산과 우생학의 문제는 창조주의 손에 맡겨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만,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력자의 위치를 고수해야 하지 않을까? ‘내 자식이라고 하는 physical line에 집착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창조물이요 그분의 백성이라는spiritual perspective로 차라리 입양을 고려하는 것이 조물주 앞에서 더 고상한 일이 아닐까?!

역지사지할 처지도 못되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순 없지만, 그저 필요한 노동력을 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능을 하도록 주신 자궁을 빌려주는 대리모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대리모를 시키는 사람들도, 자녀는 선물로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어떻게든 내 손으로 그 선물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아무래도 모양새가 선하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인정한다면, 그분의 선하신 인도와 또 섭리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 아닐까?!

결국 해답의 열쇠는, 우리 인간이 축적된 과학 문명(혹은 power)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피조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lordship이다. 그리고 이런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이러나 저러나,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세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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