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5일 월요일

퍼뮤니케이션: 우리 엄마 파이팅

다음 글은 한국 국립 특수교육원의 2007 장애인식 수기 모집 입선작으로서 안지혜(서울 가주 초등학교)양의 글입니다.

나는 6학년에 다니고 있다. 내 동생은 3학년이다. 우리 엄마는 지체장애 3급장애를 가지셨다.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리셨다고 하신다. 나는 엄마에게 업혀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업어주지 못하시는 엄마 대신에 옆집 아주머니가 놀로 오시면 그 등에 기어가서 매달려 업혀보곤 했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장애인인 게 싫었다. 절룩거리는 엄마와 같이 걸어가는 것도 싫었고 목발을 힘겹게 짚고 걸어오는 모습도 창피했다. 보조기를 신고 내 동생을 안고 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할 때쯤이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대며 넘어지는 엄마를 나는 5-6살 때부터 보며 살았다.

학교 입학 때에도 엄마는 치마를 입으셨는데 보조기 쇠신발이 다 보였다. 한 여름이 되면 너무 더우니까 엄마도 반바지를 입으신다. 보조기 쇠신발은 더 드러나 보이고, 쿵쿵쿵 소리를 내며 뒤뚱뒤뚱 걸으신다. 보조기가 무거워 힘들어하시고 살갗이 다 까져서 아파하신다. 그래도 목발을 짚으면 넘어지기도 하고 아무 데나 달아나는 동생 손과 내 손도 못 잡으시고, 시장바구니도 못 잡으시고, 비오는 날은 우산도 못 쓰시니까 자꾸 보조기를 신으시려 한다. 나는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것이 싫어 준비물도 잘 챙겨 학교에 가져갔고, 비오는 날은 엄마가 우산을 챙겨 오실까 봐 학교가 끝나자마자 내리는 비를 다 맞고 뛰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나는 3학년 때 전학을 가야 했었는데, 그 때도 엄마에게 학교에 오지 마시라고 하고 전학절차를 내가 다 알아서 했다. 엄마는 “우리 딸이 다 컸네!”하셨다. 자녀가 입학하면 처음 며칠은 부모님이 길도 가르쳐줄 겸 따라 가곤 하는데, 동생은 엄마를 꼭 모시고 가려고 했다. “언니랑 같이 가렴.” 해도 엄마랑 가야 된다고 떼를 썼다. 운동장에서 엄마랑 같이 조회를 서고 운동도 하는데, 엄마의 보조기며 목발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 이상하다!”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학년 학급에는 학부님들이 유난히 더 교실을 들락날락하시게 된다. 담임 선생님께서 환경미화를 도와달라기도 하시고 의무적으로 순번을 정해 급식을 배식하고 교실 청소를 하기에 정해진 날짜에 가셔야만 했다. 동생은 나와는 달리 엄마가 학교에 가셔야 되는 날은 일주일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엄마, 꼭 와야 돼!”하며 졸라댔다. 그리고는 정작 내일이 학교에 가는 날이면 “엄마 오늘 많이 쉬세요. 그래야 내일 학교에 오실 수 있죠!”하며 이것저것을 도우려고 했다. 엄마가 학교에 가시면 교실 창문으로 먼저 보고는 손 흔들며 엄마 보란 듯이 더 큰소리로 질문에 대답한단다. 교실 청소를 하실 때는 이것저것 거들어 주며, “우리 엄마는 아프니까, 얘들아 우리들도 해 드리자”하며 다른 친구들에게 말한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너무 안쓰러워 ‘엄마, 청소 안 오셔도 된다’고 했더니, 동생은 아니라며, ‘엄마는 앞으로도 계속 오실 거’라고 말했단다. 내 동생은 집으로 친구도 잘 데리고 왔다. “얘들아, 우리 엄마 힘드시니까 너무 어지럽히지 말고 놀자!”하며 스스럼없이 데려와 잘도 논다. 나는 이런 동생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혼돈이 생겼다. ‘내가 이상한 아이일까?’, ‘내 동생이 이상한 아이일까?’, ‘우리 엄마가 장애인인건 확실한데, 나와 내 동생은 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나 때나 동생 때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으시다. 나는 엄마의 장애를 싫어했고, 왜 하필 우리 엄마는 저 모습일까에 골몰했다면, 내 동생은 엄마의 장애를 어떻게 하면 힘이 덜 들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차이였다.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언니 같기도 했다. (다음 주로 이어집니다. from Joy 장애선교회 뉴스레터, 2008 2월호)

댓글 1개:

익명 :

확실하고 강한 모녀의 사랑이 체면은 물론
환경을 이겨내죠.
주님과의 사랑도 그래야 하겠죠.
현사무엘